이 기사는 11월 05일 15:38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거래소가 표적항암제 신약 개발사인 지피씨알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하이트론시스템즈(하이트론)에서 자금을 조달하려던 계획에 잇따라 제동을 걸었다.
거래소가 우회상장 심사를 진행하겠다고 하자, 하이트론은 지피씨알에 투자만 하겠다고 거래 구조를 변경했다. 하지만 거래소는 출자만 해도 포괄적 조항을 적용해 상장적격성 실질심사에 나서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포괄적 조항은 거래소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실질심사에 착수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을 끄집어낸 것이다. 기업들은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투자자 보호 내건 거래소 “부실기업 결합 우려”
5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는 비상장기업인 지피씨알 간 지분 거래가 진행될 경우 실질심사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공문을 상장기업 하이트론에 보냈다. 앞서 하이트론은 지피씨알 출자 및 주요 주주 간 지분 맞교환을 결정했다. 거래소는 해당 거래가 우회상장에 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우회상장 심사를 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이후 거래 구조를 변경해도 실질적 우회상장에 해당한다며 관련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 거래소의 입장이었다.
이에 하이트론은 지피씨알 투자와 관련해 우회상장 심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도록 거래 구조를 변경해도 되는지 거래소에 문의했다. 이는 최대주주 변경 등 기존 주주 간 거래 없이 하이트론이 지피씨알 유상증자에 100억원을 투자하는 방안이었다.
그러자 한국거래소는 우회상장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에 따라 실질심사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은 실질심사 대상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실질심사 사유로는 임직원의 횡령·배임, 회계처리기준 위반, 주된 영업의 정지, 공시 위반 벌점 누적, 감사의견 변경 등이 있다.
이번 하이트론과 지피씨알의 거래는 위 사유에 해당하지 않았으나, 거래소는 공익 실현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실질심사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들었다. 해당 조항은 그동안 적용된 적이 없어 사실상 사문화된 것으로 여겨지던 포괄적 규제 조항이다.
거래소는 하이트론과 지피씨알의 지분 거래를 바이오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사실상 ‘한몸’처럼 움직이겠다는 취지의 거래로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실 우려가 있는 두 기업의 결합으로 투자자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트론이 지난해 회생절차를 졸업해 상장이 유지됐지만, 현재 부분 자본잠식 상태인 데다 연간 매출이 50억원 안팎에 불과해 부실 우려가 크다고 거래소는 봤다. 이번 지피씨알 지분 투자로 바이오 사업을 정관에 추가해 신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지피씨알 역시 2개월 전 상장 예비심사에서 사업성을 강화해올 것을 요구 받아 상장을 자진철회한만큼, 두 회사의 지분 거래만으로도 하이트론 투자자 및 유가증권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봤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이번 하이트론과 지피씨알 투자 건은 그동안 유가증권시장에서 없었던 특이한 사례”라며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에 대해 해당 조항을 적용해 실질심사 대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하이트론과 지피씨알은 거래소 입장을 확인한 뒤 기업 결합이 생기지 않는 범위에서 협업을 이어가기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실질심사 ‘복불복’ 규제 우려
투자은행(IB) 업계는 거래소의 태도에 의아함을 보였다. 유상증자를 통한 투자조차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될 수 있다면 비상장사 투자가 위축될 수 있어서다. 아직 신약 연구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은 지피씨알이 상장사로부터 투자를 받으려면 거래소의 실질심사를 감수할 의지가 있는 상장사여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IB 업계 관계자는 “굳이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고 바이오벤처에 투자를 결정할 상장사는 거의 없다”며 “벤처캐피털·사모펀드 등의 바이오벤처 투자 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상장사의 투자마저 막히면 바이오벤처의 자금난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회상장 심사에 이어 사문화됐던 포괄적 조항까지 등장하면서 거래소가 하이트론과 지피씨알 거래를 애초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말도 나온다. 우회상장 규제를 살짝 비켜가려던 최초 거래 구조 때문에 ‘괘씸죄’가 추가됐다는 것이다.
사문화됐던 포괄적 조항이 부활하면서 한국거래소의 재량에 따라 규제가 복불복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어떤 경우에 거래소가 이번 사례에서 언급한 '부실기업간 결합'으로 볼지 등에 관한 이렇다 할 기준이 없어서다. 실질심사는 상장사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규제임에도 불구하고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장 관계자는 “하이트론이 처음부터 지피씨알에 유상증자 100억을 하겠다고 했더라면 실질심사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거래 주체의 최초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추측해 규제 여부를 결정한다면 거래소에 지나치게 광범위한 재량이 부여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거래소가 사실상 바이오기업의 성패를 미리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오만한 발상”이라며 “거래소가 기업 경영 활동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소지가 생기면 본질적으로 거래소가 그런 표괄적 규제를 하는 게 맞는 지 행정소송에서 다퉈볼만 하다”고 말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