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거리에 2022년부터 자리를 튼 미국 갤러리 글래드스톤.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조명받지 않았던 작가들을 다수 선보이며 미술 애호가들의 인기를 얻었다. 보다 많은 소속 작가들에게 아트페어 밖 전시 기회를 열어주면서 한국 예술계에 각인시키고자하는 갤러리의 신념 때문이다.
글래드스톤이 올해 가장 공들여 준비한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온 작가 리처드 알드리치의 개인전 ‘더블 제미니‘를 열고 관객을 맞이한다. 알드리치는 올해로 11년간 글래드스톤과 인연을 맺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부산에서 지난해 단체전에 참여한 게 전부다. 국내에서 아직 그의 이름이 생소한 이유다.
2003년부터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은 알드리치는 2010년 휘트니비엔날레에서 조각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이후 미국은 물론 유럽을 무대로 다양한 조각, 회화 작업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일본 등을 돌며 본격적으로 아시아 관객을 대면하고 있다. 한국에서 첫 전시를 열게 된 알드리치와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여는 첫 개인전에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시 개막 나흘 전 한국을 찾았다는 알드리치는 “오자마자 근처 갤러리와 뮤지엄 근처에서 다녔는데, 특히 건축물이 매우 좋았다“며 “어제 북촌과 이태원을 다니면서 전통 건축물과 현대적 거리의 차이를 보는 게 흥미로웠다”고 했다.
처음으로 개인전을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나는 자리이기에 그는 작품만큼 전시 구성에도 공을 들였다. 글래드스톤 서울의 지하와 지상 공간 2곳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하나의 건물이지만 마치 완전히 다른 공간처럼 여겨지도록 구성했다”며 “전시 제목인 '제미니'가 뜻하는 쌍둥이자리 속 두 인물을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곤 “아티스트보다 큐레이터가 된 기분이었다”며 웃었다.
알드리치의 이야기처럼 갤러리의 두 층은 완벽히 다른 공간처럼 꾸며졌다. 지상층은 햇빛과 흰색 색감을 활용해 밝게, 지하층은 회색 카펫과 어두운 조명을 이용해 차분하게 구성했다. 작가는 “밝은 1층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밝은 나를 담았다면 아래층은 어두움과 고독을 가진 나의 내면을 풀어냈다”고 설명했다.
관객이 만드는 소리에도 주목했다. 작가는 “지하에 카펫을 깔아놓은 것도 미묘하게 다른 감각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라며 “1층에서는 발소리가 들리지만, 밑에서는 카펫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목소리, 공간의 울림도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했다.
특히 지하 바닥에 깔린 회색 카펫은 작가의 대학 시절 기억을 담고 있다. 알드리치는 “학교를 다닐 때 미술관 옆 아무도 쓰지 않는 빈 방에서 혼자 매일 작업을 했는데, 그곳에도 이것과 똑같은 회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며 ”관객들로 하여금 나의 과거로 찾아오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이 문을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그림은 작업 과정이 특별하다. 알드리치는 ”항상 팔레트에 여러 물감을 섞어서 작업하는데, 팔레트에 남은 물감으로 캔버스 메운 작품이다“며 ”그래서 같은 계열의 색이라고 할지라도 조각마다 모두 색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기둥 뒤와 전시장 곳곳에는 작은 회화작품들이 놓였다. 알드리치는 ”2002년 작가의 길을 처음 걸을 무렵 매우 작은 공간에서 작업했는데, 공간의 제약 때문에 작은 그림만 그렸다“며 ”작은 캔버스를 색다르게 메울까 매번 재료를 고민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알드리치는 게임, 만화, TV 등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그곳에서 일상적 이미지를 차용해 캔버스 안에 옮겨놓는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가 이뤄지는 전시장 문 앞에 놓인 대형 회화가 그렇다. 자주 하는 컴퓨터 게임 속 텐트, 백악관 집무실을 다룬 다큐 속 미국 국기의 그림 등 다양한 요소를 한 그림 안에 짜집기하듯 녹여냈다. 그는 “잠깐 쉴 때 하는 모바일 게임에서도 이미지를 빌려오는 등 나의 일상에 차곡차곡 쌓인 이미지를 그림으로 풀어낸다”며 “이미지를 그리며 나만의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특히 음악은 알드리치의 작업을 넘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밴드에서 보컬과 기타를 치며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은 나의 정체성을 찾게 해 준 존재다. 10대를 지나며 분출하는 감정을 음악을 통해 찾았다"고 했다. 또 "미술은 나에게 계획적이고, 학문적이지만 음악은 즉각적인 나의 호불호로 이뤄졌기 때문에 내 감정을 이끌어낸다"며 "그 '날 것'의 감정은 미술 작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음악은 나에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관심이 많다. 조각과 회화를 항상 함께 선보이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서도 조각과 캔버스 작품을 같이 놓고 선보였다. 알드리치는 "나는 항상 조각과 그림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늘 그렇게 해 왔다"며 "나에게는 이 방식이 마치 공식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지하에 설치된 작업이 그의 '조각-회화 공식'을 가장 잘 드러낸다. 큰 회화가 벽에 걸려 있고, 바닥에는 조각 3점이 놓였다. 그리고 천장에서는 인간 마네킹이 마치 계단을 오르듯 내려온다. 5점의 작업이 만나 하나의 세트가 되는 셈이다. 알드리치는 "기존에는 마네킹을 조각 위에 얹어놓는 형태였지만, 이번 전시를 구상하며 천장에 달아놓는 시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음엔 마네킹이 벽에 걸린 작품을 보게끔 구성했는데, 이번 전시는 그림을 등지고 있게끔 만들었다. 마치 회화와와 조각이 대립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바닥에 놓인 조각들은 2010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석할 당시 제작했던 작품을 가져온 것이다. 그에게 15년 전 비엔날레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알드리치는 "요즘은 1년에 50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열리기 때문에 그 설렘이 덜한 건 사실"이라며 "어린시절이었던데다 인생에서 가장 큰 비엔날레였기때문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그 기억의 조각을 가져와 한국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회화들은 대부분 2022년과 2023년에 작업한 것들이다. 오직 1점만 2015년작이다. 알드리치는 "2005년에 열었던 단체전 이후 남은 오브제를 가져와 10년을 '묵혀뒀다' 캔버스에 붙인 작품"이라며 "오브제를 모은 지 20년, 제작한 지 10년 만에 다시 관객에게 선보이는 셈이다"라고 했다.
글래드스톤은 2022년 서울에 첫 갤러리를 오픈할때부터 알드리치와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었다. 알드리치는 “한국에서 갤러리를 처음 열 때부터 개인전을 꼭 하자고 이야기를 나눴다”며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기획을 시작한 대형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 즐겁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제목에서도 글래드스톤을 향한 그의 애정이 드러난다. 쌍둥이자리. 작가 자신의 별자리인 쌍둥이자리를 뜻하는 ’제미니‘ 앞에 굳이 ’더블’을 붙인 것. 이에 알드리치는 “갤러리 창립자이자 오랜 동료인 바바라 글래드스톤도 나와 같은 쌍둥이자리라는 데서 영감을 얻어 제목을 지었다“며 ”올해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1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