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종합건강검진을 받습니다. 50년 넘게 달려온 녹슨 몸 상태를 첨단 의료 장비의 힘을 빌려 훑어보는 거죠. 혹여나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고, 이를 치유하기 위한 날 선 처방도 내려질 것입니다.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이 오십 줄의 인간도 이럴진대 46억 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지구는 괜찮을까? 부질없는 이 생각에 기름을 부은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세계 굴지의 석유화학 기업 엑손모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주정부는 소송에서 엑손모빌 측이 “플라스틱 재활용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짓 광고로 소비자를 안심시켜 플라스틱을 더 쓰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 앞에 쌓이는 택배 박스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분리해 수거함에 넣으며, ‘어디선가 잘 처리되겠지. 나는 오늘도 지구환경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인 거야’라고 애써 안도했는데, 그게 다 부질없었다는 겁니다. 지구 환경오염의 공범이 된 기분이었죠.
석유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은 지구를 병들게 하는 환경오염의 주범입니다. 플라스틱은 전 생애주기 온실가스를 뿜어내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 토양, 강, 바다 등에 스며든 미세플라스틱은 인간의 몸속에까지 침투합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플라스틱에 사용되는 1만6000종이 넘는 화학물질 중 약 4분의 1을 인간 건강과 안전에 대한 잠재적 우려 물질로 보고 있죠. 플라스틱 포장재의 평균 사용 기간은 6개월이지만 썩어 없어지려면 5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플라스틱 입장에서 보면 다소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연간 생산된 플라스틱의 79%가 매립되거나 환경에 방치되고, 12%는 소각되며, 재활용되는 것은 9%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2060년에는 10억 톤 이상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엔가 버려지는 플라스틱. 방치된 플라스틱은 경우에 따라 수백 년 동안 외딴곳에서 아픔을 견뎌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버려진 유기견처럼 무책임한 인간을 원망하면서 말이죠.
〈한경ESG〉는 11월호 커버 스토리 ‘플라스틱의 배신?’에서 플라스틱 재활용 실태와 문제점, 해외 플라스틱 규제와 제도 현황,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과 미래 전망 등을 제시합니다. 더불어 플라스틱 재활용에 대한 팩트 체크로 ‘진실과 거짓’도 알려드립니다.
11월에는 부산에서 유엔 플라스틱 국제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의가 열립니다. 올해 진행되는 플라스틱 국제협약의 가장 민감한 주제 중 하나는 제조 단계에서 플라스틱 생산량을 감축하는 감량화 방안이라고 합니다. 이번 회의에서 지구와 인간, 플라스틱의 아픔까지 모두 치유할 수 있는 지혜가 모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글 한용섭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