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이슈
해외 기관투자자들이 금융위원회에 2024년 말까지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보 공시 일정(로드맵)을 발표할 것을 요청했다. 기업의 ESG 성과 평과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커서다.
해외 기관투자자들은 아시아 기후변화 투자자 그룹(AIGCC)을 통해 10월 7일 금융위에 공개서한을 송부했다고 밝혔다. 이번 서한에는 리걸앤제너럴 자산운용(LGIM), 슈로더, 피델리티 인터내셔널 등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서명 기관으로 참여했다. 이들 기관의 운용자산 규모는 총 3.5조 달러(약 4800조 원)에 달한다.
2026년 ESG 공시 시작돼야
투자자들은 서한에서 2024년 말까지 지속가능성 관련 공시 의무화 일정을 발표해달라고 요구했다. 2026년(2025년 회계연도)부터 총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기후 관련 공시 의무화,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의 영문판 발행 의무화 등도 제안했다.
2023년 10월 금융위가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 일정을 2026년 이후로 미루고 1년이 지났음에도 구체적 일정이 확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제기됐다. 이들은 한국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가 지연됨에 따라 다른 기업과 비교 가능한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렵고, 기업 성과를 평가하는 데도 지장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국내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 상장사 절반 이상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공시했기 때문에 의무화 일정을 서둘러 마련하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 크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AIGCC 관계자는 “한국 기업은 분명히 더 잘 (공시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베카 미쿨라-라이트 AIGCC 대표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지속가능성 공시와 관련한 일정을 수립하고 나아가는 중으로 한국에서도 이와 관련한 일정 수립이 더 이상 지연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AIGCC는 지난 8월 한국회계기준원이 올해 4월 마련한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공개 초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AIGCC 측은 의견서에서 스코프 3(총외부배출량), 내부 탄소가격제 등 중요 사안에 대한 공시 의무화가 포함되지 않아 정보의 국제 정합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AIGCC, 투자자 연대 촉발하나
금융권은 AIGCC가 지속가능성 공시에서 나아가 투자자와의 집단 연대를 통해 국내에서 기업 경영에 참여할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연기금뿐 아니라 국민연금이 AIGCC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AIGCC는 자산 소유자, 자산운용사, 국부 펀드를 포함한 70개 이상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운용자산 규모는 28조 달러(약 3경8642조 원)에 달한다.
AIGCC는 회원 간 소통 창구인 워킹 그룹을 현재 9개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 7월부터 한국 워킹 그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AIGCC가 자산운용사·소유자들을 모아 경영에 참여(인게이지먼트)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다. 금융위에 공개 서한을 보내거나 한국회계기준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도 한국 워킹 그룹에서 내린 결정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워킹 그룹은 삼성전자, SK이노베이션, 포스코, 한국전력을 대상으로 하는 경영 참여도 고려 중이다. 해당 기업이 CA100+ 목표(타깃) 기업에 포함돼 있어서다. 특히 경영 참여형 ESG 투자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USB, HSBC, 피델리티 인터내셔널, BNP파리바 등이 AIGCC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어 경영 참여 빈도와 강도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AIGCC 관계자는 “CA100+는 전 세계 기업 중 탄소배출이 많아 경영 참여가 필요한 기업 150여 개를 선정해 관여하는 프로그램으로 아시아 권역에 속한 회사의 경영 참여를 AIGCC에서 담당한다”고 소개했다. AIGCC는 투자자들이 기후변화, 탄소배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파악하고,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기후변화, 탄소배출 관련 정책 마련을 촉구하는 것도 주요 활동에 포함된다.
CA100+ 아시아 플랫폼 역할 자임
실제 ESG 공시 일정 수립 외에도 탄소중립 등이 지연된 기업에 서한을 보내거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CA100+는 2021년 투자자와 연대해 엑손모빌 이사진 3명을 교체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강화하고, 청정에너지로 전환을 추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대거 엑손모빌 이사 자리에 앉혔다. BP, 로열더치셸, 토탈에너지스 등 주요 에너지 기업이 탄소중립 목표를 조기 수립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국내 기업 ESG 경영에 AIGCC를 통해 관여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AIGCC를 활용하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통해 특정 기업의 ESG 현안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영향력은 높이고 불필요한 과정과 잡음은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 이번 금융위에 공개 서한을 발송하는 데에는 국민연금이 참여하지 않았으나 AIGCC 회원사 한국 워킹 그룹에는 참여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교직원연금 등 글로벌 연기금이 CA100+ 같은 이니셔티브를 활용에 기업에 온실가스배출량 감축, 기후변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집합적 영향력을 발휘해 이사진을 교체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AIGCC 관계자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대다수 논의가 밸류업에 머물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지속가능성 공시와 연계해 내다봐야 한다. 그것이 기후 밸류업의 시작”이라며 “정부는 기업이 스코프 3, 내부 탄소가격 등을 공시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균 기자 cs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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