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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한평생' 백건우, 대가의 관록으로 찬연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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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올해로 78세고, 이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음악가는 악기를 불문하고 무척 드물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68년째라는 사실이다.

그는 1956년 열 살 때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며 데뷔했다. 백건우의 레퍼토리는 바로크부터 20세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프랑스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에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쇼팽 음악이야말로 그의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핵심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시적인 서정미가 두드러지는 그의 연주 스타일에 가장 부합하는 작곡가 역시 쇼팽이다. 그는 70년에 가까운 경력 기간에 이 작곡가와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난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만 해도 그가 열두 살 때 처음 연주했고, 이후로도 셀 수 없을 만큼 연주한 곡이다.

백건우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아무리 여러 번 연주해도 이 곡에 빚을 진 느낌”이라고 고백했지만, 내 생각에는 더 이상 그런 부채 의식을 지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이번 무대는 특별하고 뛰어났다. 그 어느 악장에서도 기교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셈여림 대비와 표현이 지극히 명료했다. 선입견을 제거하고 들으면 20대 피아니스트의 연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건우의 연주에는 젊은 피아니스트라면 도달하기 어려울 깊이와 투명한 서정이 있었다. 그 어떤 까다로운 악구도 막힘없이 쉽고 유려하게 전달하는 그의 연주는 마치 수십 년 동안 함께해온 반려를 대하는 것처럼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찬연히 빛난, 그야말로 대가다운 연주였다. 그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꿈결 같던 2악장 카덴차는 특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너무나 훌륭한 1부와는 달리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신세계로부터)은 좀 엇갈리는 인상을 줬다. 지휘자 홍석원은 평소 스타일대로 각 파트의 표현을 최대한 선명하게 부각했는데, 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이 뒷받침되면 매우 멋진 연주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실수가 한층 뚜렷이 드러나는 양날의 검 같은 해석이다.

이번 공연 역시 그 장단점이 온전히 드러났는데, 일단 전체적인 해석 기조는 훌륭했다. 1악장은 매우 강건하면서 생생하게 들렸고, 4악장은 원기 왕성하고 시원스럽게 진행됐다. 2악장에서 잉글리시호른이 들려준 차분하고 꾸밈없는 연주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금관은 1악장 발전부 초입과 4악장 종지음에서 호른이 실수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피날레 후반부에서 지휘자가 성대함을 연출하기 위해 크레셴도(점점 세게)와 리타르단도(점점 느리게)를 섞은 것 역시 오늘날의 일반적인 추세에 비춰 보면 다소 구식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앙코르로는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제1번’을 연주했는데, 중간부를 대폭 잘라내 축약한 형태였다. 물론 앙코르인 만큼 길게 연주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곡을 마음대로 잘라내 연주하는 게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차라리 더 짧은 다른 곡을 연주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황진규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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