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동 주미대사가 한국의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 확보를 미국에 요청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 대사는 11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주미 대한민국대사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재처리 시설) 확보를 위해 대미(對美) 설득이 필요하다는 여야 의원들의 공통된 지적에 "(내년 1월) 미국의 신정부 출범 후 우선 추진 현안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재처리 과정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처리 시설 보유는 유사시 핵무기 제조에 나설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현재 재처리 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다.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에서도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는 인정받지 못했고, 핵무기로 전용이 불가능한 재활용 기술(파이로프로세싱)의 연구만 일부 허용받았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고 있지만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수개월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국가로 평가된다.인요한 의원은 "일본은 플루토늄을 마음대로 농축하는 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며 "우리는 미국과 동맹이고 참전했는데, 왜 일본과 달리 플루토늄 농축을 할 수 없는가. 좀 더 강하게 (미국에)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플루토늄 보유량은 수천 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고도 전했다.
조 대사의 발언은 미국 차기 행정부 출범을 계기 삼아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재처리 시설 확보를 도모할 가능성을 열어 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조 대사는 독자적 핵무장이나 미군의 한국내 전술핵 재배치는 현재 한국 정부의 입장이 아니라면서 "확장억제(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를 강화하는 것은 독자 핵무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조 대사는 "정부가 한미 핵협의그룹(NCG), 워싱턴선언(작년 한미정상회담 합의) 등을 통해 확장억제를 구체적으로,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취지는 자체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까지는 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북핵 위협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한미 NCG를 통해 한국이 미국의 핵무기 관련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정도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에 조 대사는 "NCG를 통해 (북핵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는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조 대사는 한미가 지난 6월, 북한의 핵공격 감행시 한국의 재래식 전력과 미국의 핵전력을 통합해 대응하는 가이드라인이 담긴 '공동지침'을 작성한 사실을 상기하며 "NCG 협의는 계속되고 있고 1차 가이드라인에 공개되지 않은 협의 내용도 많다"고 소개했다.
조 대사는 미국이 관여하는 글로벌 무력 분쟁에 한국이 연루될 가능성에 대해 질문받자 "(미국의 대외 무력 분쟁에서 한국이 미국을 지원할지에 대한) 결정 기준은 대한민국의 국익"이라며 "우리 국익에 맞지 않으면 (동참 또는 지원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또 북중러 3국의 위협에 대항한 한미일 3국 군사동맹 체결 가능성에 대해 한일관계의 미묘함 등을 들며 "단기간에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밝힌 뒤 "북중러 협력이 견고한 틀로 갖춰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 "북한과 대화 필요"
이날 감사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정부의 대북정책이 지나치게 강경하다고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한정애 의원은 "북한이 핵확산방지협정(NPT)을 1993년 3월 탈퇴한 후 30년이 흘렀고 2017년 6차 핵실험을 보면 (북한의 핵개발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면서 "북핵 개발 과정에서 우리가 취한 입장을 돌아보면 비난하고 억제하고 제재를 가했는데, 한편으로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나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간 단체들이 북한에 전단지를 살포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긴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불필요한 소모전이 긴장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전쟁 이후에 대한민국 최고지도자의 발언이 보다 정제될 필요가 있었다"며 "러시아와 북한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가까워졌다"고 덧붙였다.
위성락 의원도 "지나치게 대북 대결적인 자세가 아닌가"라며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대북 강경론으로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남북 군사합의를 전면 파기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군사적 신뢰구축 장치여서 그렇다"며 "모두 다 던져버리는 게 좋겠는가"고 비판했다. 위 의원은 북한에 무인기(드론)가 전단지를 살포한 사건에 관해 언급하면서 "정부가 했든, 민간이 했든, 그레이존 작전이든 간에 이것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남북관계가 과도한 이념싸움 대결싸움으로 가는 것은 한미 공조에 악재가 된다"고 말했다.
조정식 의원도 "남북관계가 상당히 과도한 대응 일변도"라며 "급변하는 외교안보 상황에서 패싱당하거나 우리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힐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용선 의원은 "북한 주민을 바꿔서 북한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취지의 '통일 독트린'은 북한의 레짐체인지(체제변화)와 흡수통일을 하겠다는 것으로 북한에서 이해할 것"이라며 "이런 제안은 남북 간에 체제 경쟁과 대립을 악화·심화시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아판 NATO 구상 "워싱턴서 논의 없어"
이시바 시게루 신임 일본 총리가 거론한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구상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조 대사는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오커스(AUKUS·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 협의체) 등과 같이 '소(小) 다자' 협력을 강화해 온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아시아판 NATO에 대해서는 워싱턴에서 미국 사람으로부터 이런 아이디어나 의견을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선을 그었다.
또 조 대사는 미중 전략경쟁 심화가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도전적 요인도 많지만 기회가 되는 부분도 있다"며 "미국 시장에 중국의 저가 상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있어서 우리 기업에는 기회가 되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중국, 러시아 등을 겨냥한) 미국의 수출통제가 우리 기업에 주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선 이후 인플레이션법(IRA) 내용이 개정되거나 관세정책이 변해서 국내 기업들이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도 거론됐다. 조 대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진하는 보편관세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한 내용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미국과 FTA를 맺은 다른 나라와 공조하여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 "IRA는 입법사항이므로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다 장악하지 않는 한은 폐지하기 쉽지 않고, 공화당 의원들도 자기 지역구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폐지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실제로 IRA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말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