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직선으로만 팔을 뻗으시면 안 돼요. 손목에 회전을 넣고 팔도 살짝 비틀듯이 샌드백을 치셔야 해요. 동시에 스텝 밟는 것도 신경 쓰시고요."
서울 여의도의 A 복싱장에서 코치로 근무하는 김석용(33) 씨는 10일 오후 7시께 한 복싱 PT(Personal Training·개인 교습) 수강생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코치는 수강생의 손목을 잡고 적당한 회전 각도를 잡아주거나, 바로 옆에서 샌드백 치는 올바른 자세를 직접 보여줬다. 운동만 복싱으로 바뀌었을 뿐 헬스 PT와 지도 방식이 유사했다.
김 코치는 복싱을 전공한 뒤 현재 종합격투기(MMA) 선수로도 활동 중인 복싱 PT 전문 강사다. 그는 "과거 복싱장이 선수를 육성하는 데 집중하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일종의 '생활 체육 공간'이 됐다. '복싱 PT'란 개념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진 것 같다"며 "다이어트가 목적인 수강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헬스 업계에서 PT 문화가 보편화된 가운데 1:1로 복싱을 코치하는 복싱 PT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어 최근 몸매를 가꾸려는 2030 여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넉 달 동안 11kg 감량"…'복싱 PT'에 빠진 이들
최근 가수 겸 배우 엄정화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에서 올여름 복싱을 통해 체중 4kg을 감량했다고 밝혔다. 엄정화는 "무엇보다 복싱은 재밌다. 보통 운동을 계속하면 지루한데 복싱은 지루할 틈이 없다"며 복싱 다이어트를 강력하게 추천했다.이날 A 복싱장을 찾은 회원들도 대부분 이같이 다이어트가 목적인 여의도 직장인이었다. 이들은 퇴근 후 이곳을 찾아 전신 거울 앞에서 '섀도복싱'을 하거나, 샌드백을 치며 땀을 뺐다. 코치들은 곳곳을 오가며 개인 운동 중인 회원들의 자세를 봐줬다.
천장에 5개의 샌드백이 매달려있는 이른바 '샌드백 존'에선 복싱 PT 수업이 한창이었다. 회원은 PT 없이 개인 운동만 신청해 다니며 자세 교정을 요청할 수도 있지만, PT 수강생은 코치가 1시간 동안 바로 옆에서 직접 운동을 지도받을 수 있다.
퇴근 후 일주일에 두 번 복싱 PT를 받는다는 40대 김모 씨는 "살을 빼기 위해 어떤 운동을 할지 고민하다 색다른 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복싱을 선택했다"며 "땀을 쭉 빼고 복싱장 내 샤워장에서 씻고 나오면 그날의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엔 여성 수강생이 늘어나는 추세다. 본업이 바리스타라는 20대 여성 노모 씨는 다이어트를 위해 두 달 전부터 이곳에서 복싱 PT를 받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을 즐겼는데 성인이 된 후 운동을 그만두니 체중이 불어났다"며 "이후 인터넷을 통해 복싱에도 PT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궁금한 마음에 바로 등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리하게 살이 빠지거나 근육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체형이 예뻐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신감이 높아져 만족스럽다"며 "주변 여성 친구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A 복싱장에서 코치 업무도 맡고 있는 이훈석(38) 실장은 "PT 수강생 중 여성 회원은 40% 정도다. 9년 동안 이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3년 전부터 주부 등 여성 수강생이 늘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여성 수강생 대부분이 20~30대"라고 설명했다.
선수 데뷔를 준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복싱 PT의 강도는 절대 약하지 않다. 끊임없이 스텝을 밟아야 하고, 힘을 줘 주먹을 뻗는 반복 동작에는 많은 칼로리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또 복싱에서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 주로 시키는 줄넘기 등 '몸풀기' 운동만으로도 수강생은 진이 빠진다.
개인 운동 중이던 강모(30) 씨는 "간단한 자세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1시간 PT를 받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며 "지금은 회사 업무가 바빠져서 개인 운동만 진행하고 있지만, 과거 넉 달 동안 복싱 PT를 받으면서 체중이 11kg이나 빠지더라"라고 말했다.
"다이어트 목적의 '생활 체육'을 넘어 '진지한 여가'로"
헬스에서 익숙한 개념이었던 PT가 복싱으로 확산하고 있는 이유를 두고 복싱의 '생활 체육화'가 다이어트 열풍과 맞물렸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복싱 국가대표 출신으로서 현재 복싱장을 운영하며 영화 '범죄도시4'에 출연하기도 한 배우 김지훈은 "과거 복싱은 격투해야 한다는 점에서 직접 배우기에 낯설고, 진입 장벽도 높은 종목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유산소와 무산소가 결합한 훈련 방식이 연예인 등을 통해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단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다이어트 수단을 넘어서 보다 더 진지한 여가로 바뀌는 추세도 보이고 있다"며 "복싱 PT 수강생들이 복싱의 매력에 빠져 아마추어 경기에 나서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고 부연했다.
최희국 대한복싱협회 사무처장은 "과거 복싱은 엘리트 운동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측면이 강했지만 이젠 확실히 생활 체육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미용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생활 체육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복싱의 기반이 탄탄해지고 있다는 뜻"이라며 "실제로 지난해 19세 이상 남·여 프로 선발 경기 신청자는 800명으로, 3년 전보다 무려 300명이 늘었다"고 말했다.
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politpe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