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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식민지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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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경험은 민족의 넋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두 조각난 광복절 행사가 그 점을 괴롭게 일깨워줬다. 우리 역사엔 식민지 시기가 두 차례 있었다. 2000년 전 한(漢)이 남만주와 한반도에 군(郡)들을 설치한 일과 한 세기 전 일본이 한반도에 총독부를 설치한 일이다. 식민지의 경험이 깊은 외상을 남기므로, 우리는 2000년 전 한의 식민 지배도 차분하게 대하지 못한다. 낙랑군은 400년 동안 한반도의 중심이었지만, 우리 통사들은 그 400년에 1%도 안 되는 지면을 할애한다.

그래서 우리는 낙랑 시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400년이 공백이니, 우리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성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런 무지는 역사에서 적절한 교훈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류는 먼저 서남아시아로 진출했다. 자연히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고 불리는 그 지역이 늘 인류 문명의 중심지였다. 지리적으로 외진 중국은 문명이 아주 늦었고, 늘 인류 문명의 주변부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살아온 남만주와 한반도는 중국 문명의 주변부였다. 즉 문명의 주변부의 주변부라는 사정이 우리 민족을 규정한 근본적 조건이었다.

중국 문명은 기원전 8세기 춘추전국시대에 빠르게 발전했다. 주(周) 왕실이 약해지고 제후국들이 경쟁하면서 시장 경제가 발전한 덕분이다. 특히 이 시기에 제철 기술이 발전해 산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역량이 늘어났다. 마침내 중국을 통일한 진(秦)과 한(漢)이 섰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문명의 중심부인 중국과 주변부인 한반도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워낙 커졌으므로, 문화 유입 과정은 격렬했고 한반도는 한의 식민지가 됐다.

낙랑을 통해 들어온 문화는 원주민의 삶에 근본적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철기는 청동기보다 다루기 쉽고 값이 싸서 널리 쓰였다. 쇠보습을 써서 땅을 깊게 갈게 되자 농업 생산성이 크게 늘어나 인민들의 삶이 나아졌다. 문화 유입을 통한 원주민의 삶의 향상은 물론 낙랑에만 머물 수 없었다. 부여, 옥저, 삼한과 같은 지역으로 문화는 흘렀고, 원주민 사회는 빠르게 발전했다.

4세기에 강력해진 고구려가 낙랑군을 차지하고 낙랑의 발전된 문화와 자산을 품었다. 이 과정을 통해 400년 전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당했던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보다 크고 뚜렷한 정체성을 다듬어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더 웅장하고 극적인 사건은 없다. 우리로선 낙랑의 역사를 이렇게 원주민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게 해야 원주민들의 후예인 우리의 정체성을 다듬어낼 수 있다.

원주민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 역사 서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20세기의 경험에도 적합하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룬 유럽 문명이 19세기 중엽에 동아시아에 밀려왔을 때, 개방이 가장 늦었던 우리 사회는 문화적 격차가 가장 컸다. 자연히 서양 문화는 우리 사회에 가장 거세게 밀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적응에 앞섰던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이번에도 우리는 새 문화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끝내는 대한민국이라는 보다 크고 뚜렷한 정체성을 이뤘다. 이처럼 식민지의 힘든 경험을 통해 보다 큰 정체성을 얻어내는 기적을 두 번이나 이룬 민족은 드물다.

이 이야기엔 멋진 후일담이 있다. 대한민국이 세워졌을 때, 당시 유행한 ‘종속이론’은 후진국이 선진국과의 교역에서 손해 볼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래서 교역보다는 자급자족을 권했다. 우리는 그런 내부 지향적 정책을 과감하게 버리고 해외 교역을 통한 경제 발전 전략을 골랐다. 우리의 성공은 많은 후진국이 우리의 전략을 따르도록 격려했고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를 위해서 한 큰 공헌이다.

그사이에 우리는 문명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이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본 우크라이나가 6·25전쟁 폐허에서 일어선 우리의 경험을 배우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도울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경험이 온 세계가 교훈을 얻을 만한 이야기로 쓰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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