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해 널리 사랑받는 화가들의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냥 봐도 독특하고 즐겁지만(대중성), 배경지식과 작품에 담긴 의미를 알면 더 깊은 매력을 느낄 수 있다(예술성)는 것이다. 지금 현대미술계에서는 스위스 출신 작가 니콜라스 파티(44)의 작품이 그런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 속 부드러운 색감과 선은 언뜻 봐도 예쁘다. 조금 주의를 기울이면 파스텔의 독특한 질감과 함께 작가의 기묘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찬찬히 작품을 감상한다면 삶의 무상함과 같은 심오한 주제, 미술사 속 명작들에 대한 파티의 독창적인 재해석을 읽어낼 수 있다. 파티의 작품이 대중과 미술평론가들 사이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이유도,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이 미술관 역사상 최초의 생존 작가 개인전으로 파티를 택한 것도 이런 다층적인 매력 때문이다.
호암미술관, 첫 생존 작가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는 파티의 신작 회화 20점을 비롯해 총 73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 제목은 먼지를 뜻하는 ‘더스트’. 파스텔을 쓰는 파티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제목이다.파스텔은 현대미술에서 잘 쓰이지 않는 재료다. 물감이 마르면 고쳐 그릴 수 있는 유화와 달리 한번 작업하면 끝인 데다 연약해서 잘 부러지고 가루가 날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에 매력을 느꼈다는 게 파티의 설명이다. “삶도 예술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아름답지요. 먼지처럼 훅 불면 날아가는 파스텔은 그 사실을 상징하는 재료입니다. 나는 나를 ‘먼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파티가 주로 다루는 주제가 삶과 죽음, 자연의 순환과 같은 ‘사라지고 변하는 것’과 관련돼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름 풍경’ ‘가을 풍경’ 등 사계절을 그린 풍경화는 자연의 순환을, ‘부엉이가 있는 초상’은 삶과 죽음 등 생명의 순환을, ‘아기’와 ‘공룡’은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들의 일시적인 속성을 다룬다.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폭포’를 비롯한 다섯 개의 대형 벽화는 파티가 추구하는 ‘사라짐의 미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티는 전시가 개막하기 6주 전 일찌감치 입국해 현장에서 이 벽화들을 그렸다. 벽에 나무판을 고정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 나무판들은 전시가 끝나면 떼어내 불태울 예정이다. 파티는 “나는 사라지는 것들을 좋아한다”며 “미술관 전시를 할 때마다 벽화를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없애는 이유”라고 말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은 모두 과거의 명작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재조합해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파티는 이런 ‘재조합’에 아주 능숙한 작가다. 전시장에 나온 ‘주름’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브론치노)와 17세기 플랑드르 화가(얀 반 케셀)의 작품에서, ‘버섯이 있는 초상’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오토 마르세우스 판 슈리에크)에게서 작품 요소를 따왔다.이번 전시에서 파티는 삼성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 고미술 명작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대거 선보인다. 국보를 비롯한 고미술품과 함께 배치된 파티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 ‘백자 태호’ 뒤에는 파티가 그린 9m 폭의 대형 벽화 ‘동굴’이 펼쳐진다. 생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동굴과 조선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던 항아리를 연결해 한 인간과 국가, 인류의 탄생과 성장을 표현했다. 고려시대 유물 ‘금동 용두보당’(국보) 뒤에 벽화 ‘산’을 그려 넣어 산속에서 용이 모습을 드러낸 듯한 장면을 연출한 것도 인상적이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청자 주전자(국보)를 그려 넣은 ‘청자가 있는 초상’ ‘십장생도 10곡병’ 속 복숭아가 등장하는 초상화 ‘복숭아가 있는 초상’ 등도 만날 수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인기 작가를 데려와 지정문화재급 우리 유물들을 주제로 작품을 그리게 한 건 호암미술관·리움미술관이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작품과 벽화뿐 아니라 파티가 직접 연출한 전시장 벽면의 색상, 아치형 통로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전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 사이 하루 두 번씩 호암미술관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전시는 유료, 내년 1월 19일까지.
용인=성수영/안시욱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