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두산 사업 재편
두산이 그룹 사업 재편 방안을 내놓은 건 지난달 11일이다. 클린에너지, 스마트머신, 첨단 소재를 3대 축으로 계열사 역할을 재편하는 내용이었다. 핵심은 스마트머신이다. 성장성이 큰 로봇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영업이익 1조3899억원을 올린 그룹 ‘캐시카우’ 밥캣을 적자기업인 로보틱스와 합병하기로 했다. 법이 정한 합병 비율(밥캣 1주에 로보틱스 0.6주)대로 합병하면 결과적으로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지주사인 ㈜두산의 밥캣 지배력이 높아진다.
금감원이 문제 삼은 게 이 대목이다. 이 원장은 “시가 기준으로 기업가치를 산정했더라도 현행법상 일부 할증·할인을 할 수 있다”며 “합병신고서에 대해 무제한 정정요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금감원이 계속 정정요구를 하면 두산은 예정된 날짜에 주총을 열 수 없어 사실상 합병이 무산된다. 두산이 합병을 포기한 이유다.
두 회사는 대표이사 명의의 주주서한을 통해 “사업 구조 개편이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돼도 주주와 시장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하면 추진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철회 이유를 설명했다.
산업계에선 “인수합병(M&A)을 하거나 사업을 재편하려면 일일이 금감원 허락을 받으라는 얘기냐”고 하소연한다. 금감원이 각종 규제권으로 월권행위를 했다는 얘기다.
○밥캣, M&A 어려워져
합병 무산으로 밥캣의 ‘성장판’이 닫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밥캣은 북미에서 매출의 70%를 올리는데, 현지 건설장비 수요가 지난해 ‘피크’를 찍고 판매량이 떨어지고 있다. 신흥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을 필두로 가격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밥캣은 이런 문제를 인공지능(AI)과 모션(움직임) 제어, 비전 인식 등 스마트머신 기업 인수로 돌파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합병이 무산돼 ㈜두산-로보틱스-밥캣 구조가 되면서 이런 기업들을 인수하는 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주회사의 손자기업은 피인수 기업 지분을 100% 인수해야 한다’는 공정거래법 규제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로보틱스와 합병하면 피인수기업의 최대주주 지분만 인수해도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지만, 앞으론 100% 인수해야 하는 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의미다. 로보틱스가 보유한 로봇기술을 활용하려는 계획도 무산됐다.
○에너빌리티·밥캣 분할은 진행
두산은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밥캣을 떼내 로보틱스 자회사로 두는 방안은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에너빌리티에 추가 투자 여력을 안겨주기 위해서다. 에너빌리티가 지분 46.0%를 가진 밥캣을 로보틱스 산하로 넘기면 밥캣이 금융권 등에서 빌린 차입금 7000억원이 사라져 추가 대출을 받을 수 있다.에너빌리티는 최근 체코 원전 2기를 수주한 데 이어 폴란드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5년간 8기 안팎의 신규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이 경우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에너빌리티가 두산큐벡스·분당리츠 등 비(非)핵심 자산을 지주사 ㈜두산에 매각해 현금 5000억원을 확보하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박상현 두산에너빌리티 대표는 주주서한을 통해 “계획된 수주 규모가 원자력 주기기 제작 용량을 크게 웃돌고 있다”며 “(사업구조 재편이 완료되면) 투자 여력이 생겨 생산설비 증설에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규/김익환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