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수석최고위원이 지난 전당대회 때 보내온 ‘김대중과 이재명을 잇는 다리가 되겠습니다’는 제목의 짧은 문자 메시지에는 ‘이재명’이 5번 등장한다. 그 외엔 윤석열 정권 심판뿐이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을 뛰쳐나와 정몽준 캠프로 말을 갈아타더니 이번엔 이재명 대표의 노골적 지지를 업고 수석최고위원이 됐다. 한때 ‘30대 기수’로 거론되던 사람이 자기 정치는 없고 오로지 ‘이재명 지킴이’ ‘이재명 대통령 만드는 총참모장’이다.
민주당 전대는 이 대표에 대한 충성 경쟁장을 방불케 했다. 첫 연설회부터 최고위원 후보들이 이재명을 언급한 횟수가 74차례나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 축하 영상에도 개딸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전직 대통령이 전대에서 당원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열광이 기괴하게 교차했다. 당 전대가 아니라 ‘이재명 부흥회’ 같았다. ‘빌런’이라는 정청래 전 최고위원 다섯 명을 모아놓은 것 같다는 정봉주 전 의원도 맥없이 나가떨어진 마당이다. 친명계가 당원권 강화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운 결과다. 이로 인해 배타적, 독단적 팬덤의 영향력이 훨씬 강화됐다.
최고위원 후보 모두 과잉 대표된 이들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은 정치 퇴행의 현주소다. 정당의 공적 기능은 사라지고 자기 파괴적인 진영 충성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떠올렸다면 과도한 것일까.
지금 야당은 큰 그림을 그리고 움직이는 것 같다. 직전 지도부에서 간간이 들리던 비명계 목소리는 자취를 싹 감추고 신성불가침의 ‘이재명 아성’이 완성됐다. 당 밖에선 이해찬 전 의원과 ‘다시 이재명의 시간’이라는 백낙청 등이 통합, 조정 역할을 하고 있다. 건국절, 독도 논란에서도 드러났듯, 야당 스피커들은 곳곳에서 진지전을 펴고 있다. ‘이재명 단일대오로 촛불 2기 완성’이 공공연히 떠돈다. 정치권에선 이 대표의 10월 재판 유죄 시 ‘광화문 촛불집회→대통령 탄핵→헌재 탄핵 결정 뒤 조기 대선’ 시나리오가 나돈다. 조국 대표에 이어 이 대표의 전략가인 김 수석최고위원과 김병주 최고위원이 줄기차게 계엄령에 불을 지피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헌법상 계엄 실현이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러는 것은 ‘탄핵 방아쇠’ 전략이란 말이 들린다.
전현희, 이언주 등 강경 일색의 최고위원들은 ‘윤석열 정권 끝장’을 외친다. “이 대표 연임이 정권 교체 지름길”이라는 정청래 법사위원장, “이재명 10명 있으면 좋겠다”는 최민희 과방위원장은 국회 공적 시스템에서 떠받치고 있다. 이 대표도 “총구는 밖으로, 외부 거악과 싸워야”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먹사니즘’을 시발로 대선 준비에 들어갔다. ‘집권플랜본부’도 만든다고 한다. 조 대표도 ‘탄핵’에 국민과 공무원 동참을 촉구하며 거든다. ‘만약’을 대비해 총체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런 야권의 ‘빅픽처’에 여권은 안이하다. 지난 총선에서 맞지 않아도 될 매를 맞은 여러 원인 중에는 아무래도 ‘김건희 여사 리스크’가 크다. 해법은 간단한데 여전히 이 올가미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검찰과 영남에 갇혀 있다. 야권의 이해찬, 백낙청에 필적할 보수 원로들은 찾기 어렵다. 야권의 광복절 반일 몰이에도 여당 지도부 누구 하나 반박하지 않았다. ‘집단게으름’이란 말이 정곡을 찌른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30일 단독 회동 이후 갈등의 고비를 넘긴 것 같지만, 국민 마음을 사로잡을 감동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물은 아직 없고, 아슬아슬한 휴화산이다.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을 통해 국민연금 등 개혁 방안을 밝힌다. 지난 2년간 하나도 진전을 보지 못한 4대 개혁을 이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해야 한다. 거대 야당의 빅픽처에 맞서려면 민심이 뒷받침돼야 한다. 보수가 경제 유능함마저 잃어버리면 진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당내 소모적 전투에 함몰돼서야 어떻게 전쟁에서 이기길 바랄 수 있겠나. 일사불란한 야당과 무기력한 여당의 심각한 힘의 부조화는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10월 정치 변곡점이 닥쳐올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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