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퓰리처상에 빛나는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20세기 최고 희곡으로 불린다. 레이거노믹스, 드래그퀸, 유대인 사회와 모르몬교 등 당시 미국 사회를 꿰뚫는 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승호 배우의 연극 데뷔작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다소 난해하다는 관람평이 나온다. 1980년대 미국 사회상을 알아야 공감 폭이 커지기 때문이다.
작품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침체에 빠졌던 1985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정부지출 축소와 규제 완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경제 중흥을 이끌었지만 빈부 격차가 커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표현할 정도로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고 공공연히 핵전쟁 공포를 부추겼다. 동성애자와 에이즈 환자에 대한 혐오가 거세게 분 시기기도 하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동성애자와 에이즈 환자, 마약상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희곡의 작가는 토니 쿠슈너. 유대인이자 동성애자다. 쿠슈너는 ‘밀레니엄이 찾아온다’는 부제로 세기말 미국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그렸다.
유승호는 월터 프라이어 역할을 맡았다. 프라이어는 화려한 여장을 하고 춤과 노래를 선보이던 전직 드래그퀸이자 에이즈에 걸려 괴로워하는 동성애자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지만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조차 어렵다. 의사는 피부 질환이라며 나아질 거라고 얘기하지만 그는 혈변을 바지에 지릴 정도로 몸이 망가져 간다.
그의 동성 연인 루이스 아이언슨은 유대인이다. 애인이 정체 모를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두려움에 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정의와 이념에 대한 사념을 늘어놓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남자와 욕정을 나눈다.
프라이어와 아이언슨 이외에도 동성애로 괴로워하는 모르몬교 신자, 약물 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아내, 에이즈에 걸린 정치가와 부패한 유대인 변호사 등이 등장한다. 이들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와중에 난데없이 천사가 등장한다. 에이즈를 ‘동성애자에게 내리는 천벌’로 여긴 사회 속에 에이즈 환자들이 마주한 공포와 죄책감이 응집된 설정이다.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저마다 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종교적·사회적 자아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정체성이 서로 엇갈리고 충돌한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 사회는 이들을 보듬어주기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차갑다. 소수자들이 겪은 차별과 고통을 그리면서 다양성, 존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극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요소는 바로 소리. 극 전반에 불협화음의 음악이 깔린다. 천사가 불호령 같은 개시를 내리는 대목도 깊은 목소리부터 고음역대의 목소리까지 뒤섞인 기이한 소리가 극장을 쩌렁쩌렁 울려 웅장하면서 소름이 끼치게 한다. 당시 소수자와 에이즈 환자가 느꼈던 공포가 객석으로 전해진다.
미국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모순은 보편적이다. 종교, 성 정체성, 질병과 낙인. 이런 실체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에 부딪힌 인물이 느끼는 무기력함과 공포가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다만 이런 인물들에서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묘사가 다소 투박하다. 넓은 감정 폭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속삭이거나 격정적으로 대사를 내뱉을 때 대사가 잘 안 들리는 장면도 있다.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감정과 다른 인물과의 관계 변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인물들이 각자의 이유로 속이 썩어들어가고 치열한 고뇌에 빠지는 모습도 섬세하게 전해지지 않아 공감하기 쉽지 않다.
무기력함과 불안이 숨 막히는 작품.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 섬세한 연출로 그린다면 호소력 있는 공연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공연은 오는 9월 28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