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은행권 최고경영자(CEO)를 둘러싼 ‘인사 태풍’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5대 시중은행장인 이재근 KB국민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이승열 하나은행장, 조병규 우리은행장, 이석용 NH농협은행장의 임기가 오는 12월 31일 일제히 만료된다. 적어도 임기가 만료되기 3개월 전에는 경영 승계 절차에 돌입해야 하는 만큼, 9월부터는 각 행별 승계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임기 도전…이재근 KB국민은행장
우선 KB국민은행의 이재근 행장은 다른 시중은행장들이 초임인 것과 달리 1년의 추가 임기를 지내고 있다. 지난 2022년 1월 윤종규 전 KB금융지주 회장 체제 아래 은행장 자리에 오른 이 행장은 2년 임기를 채운 뒤 지난해 연임에 성공했다. 현재 수행 중인 ‘2+1년’ 임기에 이어 재연임이 된다면 내년 세 번째 임기를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이 행장의 가장 큰 무기는 최근 보여준 KB국민은행의 호실적이다. KB국민은행의 올 2분기 당기순이익은 1조1164억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 증가했다. 재임 기간 내내 연간 순이익이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며 역대 최대 순이익을 경신한 점도 긍정적인 요소다. 지난 2021년 2조5908억 원을 기록했던 KB국민은행의 순이익은 이 행장이 선임된 2022년 2조9960억 원, 2023년 3조2615억 원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홍콩H 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사태, 배임 사고 등 올 상반기 불거진 잇단 논란이 이 행장의 연임 가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느냐다. KB국민은행은 은행권을 떠들썩하게 했던 홍콩 ELS 최다 판매사다. 대규모 손실의 여파로 1분기 홍콩 ELS 손실 관련 충당부채를 8620억 원으로 설정한 바 있다. 다만 2분기 들어 눈에 띄는 실적 개선을 이뤄낸 덕에 1분기에 입었던 타격을 상당 부분 만회했다.
여기에 올 상반기 KB국민은행 지점에서 100억 원 이상 대형 대출 배임 사고가 3건 적발된 것도 이 행장으로서는 부담 요소다. 최근 금융당국은 KB금융지주와 KB국민은행에 대한 정기검사를 착수하기도 했다. 이번 정기검사에서 금융감독원은 ELS 사태와 배임·부정 대출 등 금융 사고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될 만한 내부통제 실태를 살피려는 의도도 깔려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물론 이 행장의 연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요소는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의 복심이다. 이 행장은 전임 회장 시절 선임되고 양 회장 체제에서 유임된 케이스다. 윤 전 회장은 9년 임기를 마무리 짓고 떠나던 지난해 말 “(후임인 양 회장에게는) 이재근 행장이라는 아주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행장에 대한 윤 전 회장의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직 회장의 인식에 화답하듯 양 회장도 취임 후 첫 인사에서 핵심 계열사인 KB국민은행의 인선만큼은 ‘변화’가 아닌 ‘안정’을 택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KB금융그룹 내 증권사, 카드사 등 주요 계열사 CEO 임기가 모두 만료된다”며 “지난 인사에서는 이 행장이 유임됐지만, 다가오는 인사에서는 양 회장이 자신의 색깔을 살려 새 인물을 발탁하는 등 전반적인 쇄신을 꾀할 가능성도 있다. 양 회장의 의중에 따라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고 내다봤다.
우리·농협, 내부통제 리스크…CEO 책임론
지난해 7월 취임한 조병규 우리은행장의 경우 최근까지도 내부통제 리스크가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 연임의 장애물이 될 전망이다. 우리은행은 조 행장 취임 이후 ‘순이익 1등’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력한 영업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각종 횡령, 부적정 대출 논란이 줄줄이 터지면서 ‘성과’보다 ‘내부통제’ 이슈가 주요하게 부각되는 모습이다.
더욱이 올해는 직원 개인의 비위를 넘어 전직 회장과 관련된 부당 대출 정황까지 나왔다. 우리금융의 거듭되는 내부통제 강화 선언도 결국 공염불이 됐다는 비판이 거센 이유다. 우리은행 김해지점 대리급 직원이 180억 원 규모의 회삿돈을 횡령한 사실이 올 6월 드러난 데 이어, 최근에는 전직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이 친인척을 대상으로 350억 원 규모의 특혜성 부당대출을 실행했다는 혐의를 받게 됐다.
조 행장은 지난 6월 불거진 직원 횡령 사건에 대해 “강화된 내부통제 시스템을 통해 자체적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원천적으로 막지 못했던 점은 부족했다”며 향후 재발 방지를 약속한 바 있다. 또 손 전 회장과 연루된 부당대출 논란과 관련해서는 최근 열린 긴급임원회의에서 “은행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과거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인식하겠다”며 “조치를 취해야 할 부분은 반드시 명확히 규명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물론 취임한 지 불과 1년 남짓인 조 행장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에는 과도하다는 인식도 있지만, 재임 기간 동안 내부통제 시스템의 허점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론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우리은행은 내부통제 부실 논란이 거듭된 탓에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조 행장뿐만 아니라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국정감사 출석이 거론된다.
하지만 우리은행이 과거 CEO의 짧은 임기와 잦은 교체로 경영 연속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 행장의 임기가 1년 6개월에 그치지 않고 연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시중은행장들에게 2년의 기본 임기가 주어지는 것과 달리 조 행장은 이원덕 전 우리은행장이 자진 사임한 영향으로 처음부터 짧은 임기를 받았다.
조 행장은 우리은행이 지난해 처음 시도한 은행장 승계 프로그램을 통해 취임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 행 내에서 반복됐던 한일은행과 상업은행 출신 간 갈등을 최소화하고 공정한 CEO 발탁 과정을 확보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조 행장의 경우 행장 취임 전부터 그룹 내 ‘영업통’으로 꼽혀 온 만큼, 임 회장이 강조해 온 영업력을 구현하기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꾸준히 받았다. 우리은행의 2분기 당기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2% 증가한 8870억 원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2분기 말 기업대출 잔액은 182조9370억 원으로 4대 시중은행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상반기 순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13.6% 늘어난 1조6790억 원을 기록,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금융권 관계자는 “조 행장의 영업 성과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에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짧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각종 내부통제 리스크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중은행은 또 있다. 바로 이석용 행장이 이끄는 NH농협은행이다. NH농협은행에서는 지난 3월 109억 원의 부당대출 배임 사고에 이어 지난 5월에는 2건에 걸쳐 64억 원의 배임 사고가 연달아 불거졌다.
특히 NH농협은행의 경우 구조적으로 농협중앙회의 영향권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데, 지난 3월 취임한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이 “중대 사고가 발생한 계열사의 CEO 연임을 제한하겠다”는 뜻을 줄곧 내비친 점은 이 행장으로선 부담 요소다. 강 회장은 ‘내부통제 및 관리책임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사고 발생 시 계열사 대표의 연임을 제한하고 관련 책임자에 대해서는 업무를 즉시 정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지난 5월의 일이다.
더욱이 이석용 행장뿐만 아니라 이석준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임기도 올 연말 종료될 예정이라, NH농협금융 계열사 전반적으로 CEO 거취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점쳐진다.
큰 잡음 없는 신한·하나…연임 순항할까
올해 CEO 리스크로 이어질 만큼의 구설이 없어 연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관측되는 은행장들도 존재한다.
우선 신한은행을 이끄는 정상혁 신한은행장은 취임 첫해인 지난해에는 당기순이익이 3위로 내려앉으면서 다소 아쉬운 실적을 냈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올 들어 영업력 개선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분기 당기순이익 9286억 원으로 리딩뱅크 자리를 탈환했다. 이어 상반기 당기순이익도 전년 대비 22.2% 증가한 2조535억 원을 기록해 은행권 내 유일한 ‘2조 클럽’으로 이름을 올렸다.
신한은행도 올 1분기 ELS 손실 사태의 영향권 아래 놓인 탓에 2740억 원의 충당부채를 적립했으나, 연임에 적신호가 켜질 정도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정 행장은 한용구 전 신한은행장이 취임 한 달 만에 건강 문제로 갑작스럽게 퇴임했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선임됐음에도 조직을 빠르게 안정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행장이던 시절 비서실장, 최고재무책임자(CFO)로 보폭을 맞췄던 최측근이기도 하다. 당분간은 진 회장-정 행장 간의 파트너십이 더 이어질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더해지는 이유다.
이승열 하나은행장은 ‘첫 외환은행 출신’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CEO다. 이 행장의 취임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간 화학적 통합의 ‘완결판’이라는 인상을 줬다.
취임 이후 성과도 좋았다. 만년 3위라는 인식이 컸던 하나은행이 당기순이익 1위로 올라섰던 2022년의 성과를 이어받아, 지난해에도 당기순이익 3조4766억 원으로 리딩뱅크 자리를 이어 갔다. 다만 올해는 1분기 ELS 손실 충당부채 1799억 원과 신한은행의 실적 약진으로 순위는 다시 한 단계 밀린 상태라, 하반기 성과에 따라 리딩뱅크 수성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이 행장의 연임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할 만한 요소는 없는 상태지만,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뒀다는 점이 가장 큰 변수다.
한편, 이번 은행권 CEO 승계 절차는 지난해 말 금융당국이 처음 내놓은 지배구조 모범 관행에 따라 이뤄지는 만큼 과거보다 빠르게 진행될 예정이다. 모범 관행에 따르면 각 은행은 CEO 임기 만료 3개월 전부터 승계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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