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글로벌 금융회사가 밀집한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일대.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 사이로 선글라스를 낀 관광객이 여럿 보였다. 대규모 녹지공간 ‘그린 하트’로 유명한 오피스·주거 복합시설 마리나원 등은 건물 자체가 관광지다. 인공 수로를 따라 명품 가게와 고급 호텔 등이 들어선 마리나베이샌즈도 인근에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싱가포르 도심은 쇼핑·오락시설 없이 오피스만 덩그러니 있었다. 밤과 주말엔 텅 비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토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업무와 주거, 숙박시설 등을 함께 조성하는 복합개발을 추진한 뒤 사람이 몰리는 곳으로 바뀌었다. 싱가포르가 아시아 ‘비즈니스 허브’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배경이다.
복합개발 유도하는 화이트존
싱가포르의 도시계획 구조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1997년 도입된 ‘화이트존’(입지 규제 최소 지역)이다. 1종 주거, 상업처럼 지역엔 지을 수 있는 건물의 용도가 정해져 있다. 화이트존은 단일 용도를 적용하지 않고 주거 50%, 호텔 30%, 오피스 20%처럼 복합개발을 유도하는 게 특징이다. 복합개발로 ‘직주통합’ 및 외국인 생활 편의성 향상을 이뤄 도시가 더 활기를 띠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전반적 청사진과 최소 주거 면적 비중 등 몇 가지 가이드라인만 제시한다. 구체적 내용은 시장 수요를 잘 아는 민간(디벨로퍼)의 제안을 받아 ‘보텀업’(상향식)으로 결정한다. 화이트존이라고 해도 필지별로 용적률이 다르다. 다만 2000%가 넘는 용적률도 허용하는 등 일반 상업지역보다 규제가 약한 편이다.
녹지를 늘리거나 개성 있는 디자인을 적용하면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싱가포르가 천편일률적 빌딩 숲에서 벗어난 이유다. 노후 항만 일대를 매립해 2000년대 초반부터 개발한 마리나베이가 대표 성공 사례다. 연구개발(R&D)과 바이오 등 지식산업을 유치하는 데도 복합개발을 활용한다. 내털리 크레이그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싱가포르 총괄대표는 “R&D 등이 중심인 ‘비즈니스파크 존’ 공간의 15%를 화이트존처럼 용도와 용적률 규제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화이트존을 마천루(초고층 건물)를 유도하는 제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관옥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용적률을 결정할 때 단일 건물만 고려하는 게 아니라 주변 건물과의 조화, 수요의 차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며 “예컨대 R&D가 중심인 원노스 지역의 화이트존 부지는 중저층 위주로 계획됐다”고 설명했다.
예측 가능성 높은 도시계획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싱가포르에 아시아본부를 둔 다국적 기업은 4200여 곳이다. 한때 경쟁자로 통하던 홍콩(1337곳)을 크게 제쳤다. 싱가포르의 상업시설 발주액은 작년 25억달러에서 올해 45억달러로 82.4%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싱가포르 도시계획의 가장 큰 장점은 예측 가능성에 있다. 싱가포르 도시재개발청(URA)은 콘셉트플랜과 마스터플랜을 세운다. 10년마다 수립하는 콘셉트플랜은 40~50년 뒤의 밑그림을 그리는 개념이다. 창이공항과 마리나베이샌즈 등도 1971년 최초 콘셉트플랜 수립 당시부터 구상됐다. 마스터플랜은 5년마다 시대 변화에 맞게 계획을 다듬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민간 입장에서는 어느 지역이 어떤 콘셉트로 개발될지 예측할 수 있다. 현지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오차드 지역 재건축, 마리나베이 2단계 개발 발주 등이 곧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URA 홈페이지에는 지구별 용도와 개발 밀도, 용적률 등이 세세히 기재돼 있다. 디벨로퍼는 입찰에 나올 부지의 사업계획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선거 결과가 바뀔 때마다 도시개발 구상이 뒤틀리는 국내와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계획이 일관성 있고 투명하게 이뤄진다. 물론 싱가포르는 토지의 90%가량을 국가가 소유해 효율성이 높은 측면이 있다. 싱가포르에선 그림자 규제도 덜하다. 번화가인 탄종파가 건물의 고도제한 규제를 낮출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싱가포르=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