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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전쟁 장기화에 유럽 식량안보 '경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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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ESG] 글로벌/ 유럽은 지금



슈퍼마켓 진열대가 텅텅 비었다. 음식을 구하지 못해 굶주린 사람들은 거리를 점령했다. 슈퍼마켓은 하나 남은 음식을 서로 가져가려 싸우는 사람들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경찰이 상황을 진정시키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더 암울한 건 상황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룟값이 치솟고 농산물 공급망은 완전히 마비됐다. 농부들은 파산 직전이다. 관리되지 못해 오염된 비료를 먹은 소와 가축이 죽어가기 시작한다. 농산물 가격은 더욱 치솟고, 세계 각국은 식량 전쟁에 돌입한다.

재난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상황은 지난 4월 유럽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식량안보 컨퍼런스’에서 나온 ‘식량 위기’로 인한 전쟁 대비 시나리오다.

유럽 너마저현실이 된 식량 위기

유럽은 식량안보 문제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꼽힌다.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비롯해 세계적 농산품 생산 수출 국가들이 포진해 있어 유럽 내 국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데 비교적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 기준 전 세계 식량안보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도 핀란드, 아일랜드 같은 유럽 국가였다.

이처럼 탄탄한 식량안보를 자랑하는 유럽마저 식량안보 위기를 얘기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유럽연합(EU)에서 식량안보는 주요 의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상황이 급변했다. 코로나19로 세계 식량망에 교란이 발생하고, 계절 노동자가 부족해지면서 농산물 생산량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EU는 2020년 5월 그린딜의 ‘농장에서 식탁까지 전략(A farm to fork strategy)’을 발표했다. 정치·경제·환경적 요인에 따른 식품 공급 위기가 언제든 촉발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상황은 악화됐다. 식당, 호텔 등 음식 서비스 수요가 감소하면서 식품 공급 체계에도 위기가 불거졌다. EU는 2021년 11월 ‘식량 공급과 식량안보 강화를 위한 비상계획’과 함께 ‘EU 식량안보 위기 대응 체계(The European Food Security Crisis preparedness and response Mechanism, EFSCM)’를 설립해 2022년 3월 공식 출범했다.


2022년에 시작된 러·우전쟁은 유럽의 식량안보 위기에 불을 붙였다. ‘유럽의 빵 바구니’로 일컫던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막히며, 곡물 부족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문제가 됐다. 밀·옥수수·해바라기씨 등 가격이 치솟았고, 특히 비료 가격이 크게 올랐다. 이는 방대한 축산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유럽에는 치명타가 됐다.

이 와중에 시장을 더욱 교란시키는 건 최근 러시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비료다. 전쟁으로 인해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으면서 유럽 내 비료 생산자들은 높아진 생산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사업을 중단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일부는 유럽이 아닌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세계 최대 화학 그룹인 바스프는 최근 몇 년간 비료를 포함해 유럽 사업을 축소하고 대신 미국과 중국에 신규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비료 생산에 필수적인 암모니아를 생산하는 독일 최대 업체인 SKW 피에스테리츠도 현재 미국 내 암모니아 생산 라인을 구축 중이다. 싱그르 CEO는 “조만간 우리를 포함해 모든 기업이 유럽을 빠져나와 미국 등을 따라갈 것이다”라며 “지금 유럽 내 정치인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유럽 내 비료 생산 능력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유럽의 거대한 농축산업이 모두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다.

‘기후 위기’로 식량안보 문제 불거져

유럽 내 국가의 식량안보에 대한 인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 식량안보는 더 이상 ‘언젠가 닥칠지도 모르는 위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식량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EU의 목표는 분명하다. 단기적으로는 식량 생산과 유통이 활발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농약과 비료를 줄이고 기후변화에 따른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유럽이 기후 위기 대응과 식량 생산 안정화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점이다. 기후 위기는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오래전부터 지목받아온 가장 큰 요인이다.

유럽환경청(EEA)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앞으로 30년 동안 유럽의 농업생산이 50%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EU는 오래전부터 친환경 정책을 강화하며 고삐를 죄어왔다.

이로 인해 유럽 농민에게 환경부담금 등 비용 증가로 이어지며 식량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그중에서도 ‘휴경 의무 해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농업인들이 직불금을 받기 위해 생물다양성 보존이나 토양 보호에 도움이 되도록 일정 비율 이상 면적을 휴경하도록 의무화한 것인데, 이 의무를 해제하면서 기후 위기 대응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은 특히 휴경을 통해 농업환경의 다양성을 확보할 경우 향후 생산량 증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의 시선에서 휴경은 ‘농업생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만큼 당장의 농업생산량만 고려하는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EU는 ‘속도 조절’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농업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올해부터 강화하기로 한 여러 가지 친환경적 조치나 의무에 한시적으로 유예 조치를 도입했다.

휴경 의무를 해제해 농가가 새로운 환경 활동을 수행,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농가가 지역적 환경에 맞게 자율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환경 조건 준수 의무가 면제되는 소규모 농장의 상한선을 10ha로 증가시킨 것도 눈에 띈다.

이와 함께 유통 과정에서 생산자의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비용, 이익 및 거래 관행에 대한 면밀한 모니터링도 실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전체 식량 공급 체계에서 생산자 조직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막힌 수출길을 우회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무관세 수입을 허용하고, 인접국 육로 등을 활용한 수출을 촉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우선 식량 생산과 유통이 충분히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식량 전문가들은 조만간 유럽 내 식량 공급에 ‘실질적’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팀 벤턴 식량안보 전문가는 “국제사회의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유럽은 지금 ‘시장 효율성’에서 ‘안전한 식량 공급’으로 논의의 초점을 옮겨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런던=이정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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