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바이오 사업을 배터리, 반도체와 함께 3대 성장동력으로 꼽은 건 2021년이었다. 이들을 묶어 ‘BBC’(바이오·배터리·칩)로 부르며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SK는 바이오 분야를 세밀하게 나눠 신약 개발은 SK바이오팜에, 백신 개발은 SK바이오사이언스에, 위탁개발생산(CDMO)은 SK팜테코에 맡겼다.
SK는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보다 출발이 늦은 SK팜테코의 몸집과 실력을 단번에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인수합병(M&A)을 선택했다. 2018년 미국 CDMO 기업인 앰팩을 8000억원에 사들인 데 이어 2021~2023년 약 1조원을 들여 프랑스 이포스케시와 미국 CBM을 잇달아 손에 넣었다. 그렇게 SK팜테코는 국내외에 7개 공장을 굴리는 글로벌 CDMO 기업이 됐다.
하지만 우량 자산을 대거 확보했다고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만 해도 미국 버지니아 공장을 증설하고 새 식구가 된 CBM의 영업손실 등을 반영하느라 920억원 적자를 냈다. SK가 ‘공격 투자’ 일변도였던 바이오 사업의 속도 조절에 나선 이유다. 그룹 경영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지금은 ‘몸집 불리기’보다 ‘내실 다지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보노디스크의 ‘러브콜’
SK팜테코가 앰팩을 인수하며 손에 넣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텍사스 CDMO 공장은 품질과 수율이 보장된 우량 자산으로 꼽힌다. 미국 정부가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 비축 필수 의약품 공급자’로 선정했을 정도다.비만치료제 ‘위고비’ 덕에 유럽에서 몸값(시가총액 880조원)이 가장 높은 제약회사가 된 노보노디스크가 SK팜테코의 버지니아 공장을 콕 집은 이유다. 노보노디스크는 위고비 수요가 폭증하자 외주 생산을 직접 생산으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작은 지난 2월 노보노디스크 지주사인 노보홀딩스의 캐털란트 인수였다. 무려 165억달러(약 22조원)를 주고 세계 3대 CDMO 기업을 품었다. 노보노디스크는 추가로 41억달러(약 5조7000억원)를 들여 SK팜테코 버지니아 공장을 비롯해 미국에 있는 여러 CDMO 공장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노보노디스크의 CDMO 공장 인수 의지가 큰 만큼 M&A 성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SK팜테코가 공장 매각 대금으로 재무 구조를 개선하는 동시에 바이오의약품 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세포·유전자치료제 분야에도 투자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세포·유전자치료제는 환자 특성에 맞게 세포를 조작·배양하고, 유전자 결함을 교정하는 방식의 치료제다.
투자 지분 정리 나선 SK
SK그룹의 사업 구조조정은 크게 두 갈래로 이뤄지고 있다. 하나는 돈줄이 마른 계열사에 알짜 계열사를 붙여 재무 구조를 튼튼하게 보완해주는 방식이다. 배터리 제조사인 SK온을 지원하느라 빚이 크게 늘어난 SK이노베이션과 조(兆) 단위 영업이익을 내는 SK E&S를 합병하는 게 대표적이다. SK에코플랜트(옛 SK건설)와 SK머티리얼즈의 산업용 가스 자회사를 합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두 번째는 우량 자산 매각이다. ㈜LG와 달리 투자형 지주사인 SK㈜는 공격적인 투자로 현재 130여 개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경쟁력을 잃은 기업의 지분은 물론 성장성이 높은 기업의 지분도 매각 대상에 올렸다.
한국초저온이 그런 예다. SK㈜는 한국초저온 보유 지분 21%를 전량 매각하기로 하고, 가치 평가를 위한 입찰제안요청서(RFP) 제출을 회계법인들에 요청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영하 75도 이하 초저온을 유지하는 기술을 갖춘 이 회사는 삼성웰스토리, 현대그린푸드, 쿠팡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업계에선 SK㈜가 지분 매각에 성공하면 현금 600억원을 거머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당초 SK㈜를 비롯한 주요 주주들은 한국초저온을 2년 내 싱가포르 등 해외 증시에 상장하면 기업가치가 지금보다 7배가량 높은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하지만 계열사 및 투자 자산을 ‘통제 가능한 범위’로 줄인다는 방침에 따라 SK㈜만 지분 매각 시점을 앞당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룹 안팎에서는 SK㈜가 투자한 100여 개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매각 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SK㈜는 올 들어 지분 투자를 한 건도 하지 않았다.
김형규/하지은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