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과 한경닷컴은 매주 월요일 대치동 교육 현실의 일단을 들여다보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최근 젊은 부모들 사이 4세 고시라 불리는 시험이 성행 중이다. 어린 자녀들을 ‘이곳’에 보내기 위해 공부를 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대소변 가리기, 엄마 없이 혼자 앉아 있기, 연필을 쥐는 악력 키우기 등을 훈련한다고 한다. 입시 경쟁의 출발선을 앞당겼다고 평가받는 이곳은 어디일까.”
지난해 11월 ‘문제’를 다루는 한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 나온 질문이다. 정답은 ‘영어유치원’.
방송에선 예약이 빨리 마감돼 대신 신청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있고, 월 200만원의 학원비에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소개했다. 쌍둥이를 둔 출연자 정형돈 씨는 “돈을 떠나서 4세라는 나이에 저런 걸 해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고 했다.
시청자들 사이에선 “과장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지만, 대치동에서는 엄연한 현실이다. 영어유치원은 시작일 뿐. 3대 어학원에 보내기 위한 ‘7세 고시’가 치열한 곳이다. 만 3~5세 아이들이 영어와 수학은 물론 논술학원에 다니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영유’ 졸업 후 3대 어학원으로…학원도 학생도 ‘경쟁’
학령인구 감소에도 대치동 유아 사교육 시장은 점점 더 과열되고 있다. 유치원생들의 사교육 입문 과목은 영어다.
대치동에서 ‘3대 영어학원’으로 꼽히는 곳은 PEAI(피아이), ILE(아이엘이), 렉스김어학원이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해도 가기 어려운 학원’들로 꼽힌다. 예비 초1을 대상으로 하는 레벨테스트에 합격하기 위해 ‘7세 고시’가 생겨난 이유다.
아이들은 듣기와 말하기, 읽기, 쓰기를 비롯해 인터뷰(면접) 등 영역별로 시험을 보고 평가받는다. 여기에 입학하려고 강남권 거주 아이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입학 희망자들이 몰려든다.
입학을 위해 별도의 과외를 받기도 한다. 매년 10월~11월 본격 입학 시즌이 시작되는 만큼 그전까지 준비를 끝내야 한다.
수업은 대부분 미국 교과서로 진행된다. 이들 학원의 차별점은 분명하다. 1995년 생긴 렉스김 어학원은 듣기와 말하기 능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교육한다. 원어민 수업이 있는데, 자연스러운 영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걸 돕는다.
가장 오랜 세월 자리한 만큼 학생별 관리도 까다롭다. 3대 학원 중 숙제량도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학원이 생기고 정확히 10년 뒤인 2005년에 ILE가 대치동에 들어섰다. 듣기와 말하기, 읽기, 쓰기 등 4가지 영역 모두를 종합으로 학습하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에 부모들을 홀렸다.
2006년에 들어선 PEAI는 영어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키우는 커리큘럼에 중점을 뒀다. 미국 학교 수업처럼 프로젝트성 수업과 토론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를 따라 학생별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는 신생 어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PEAI 출신 유명 원장 이끄는 A 학원은 부모들의 발걸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 학원은 특히 레벨테스트에서 인터뷰로 합격 여부를 가르지 않아 선호하는 부모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교재와 숙제량을 늘려 기존 3대 어학원의 탄탄한 커리큘럼을 모방한 학원도 생겨났다. 3대 어학원이 원어민과 교포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과 반대로, 한국 강사를 채용해 부모들과의 소통을 키우는 등 차별화에 나선 곳도 있다.
학원 가려고 학원 다닌다…사고력 수학에 빠진 부모들
대치동 아이들은 5세에 영어를 시작한 데 이어 6세부턴 사고력 수학에 집중한다. 이들은 유치원 시기 정형화한 교과 수학보다 사고력 수학·연산을 중심으로 수업을 듣는다.
대표적인 대치동 유아 대상 사고력 수학학원은 대치소마와 대치시매쓰다. 이들 학원 모두 레벨테스트 결과에 따라 반이 나뉘고, 자체 교재를 강조한다. 특히 대치소마에서 가장 수준 높은 반인 ‘프리미어반’ 합격을 보장한다고 내세우는 과외식 학원도 등장했을 정도다.
대치소마는 자체 교재로 사고력 수업을 진행한 뒤 부교재로 숙제를 내줘서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게 한다. 분기에 한 번 시험을 쳐 높은 반으로 '레벨 업'할 학생도 선발한다. 소마는 “다양한 생활 속 소재로 아이들의 배경지식을 넓혀주고 교구와 게임 등의 활동을 통해 수학의 흥미를 유발해 사고력과 창의성을 키워준다”고 소개한다.
대치시매쓰는 6~7세 대상의 사고력 수학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했다. 이 학원은 “능동적인 탐구 및 체험 중심의 활동을 통해 수학적 사고력과 창의적 문제 해결력의 탄탄한 기반을 쌓게 된다”고 강조한다.
“영재원 합격과 경시대회 수상을 보장한다”고 내세우는 학원도 많다. 하나의 건물에 2~3개의 영재학원이 붙어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함 영재원은 이곳만의 연산법으로 입소문이 났다. 단순히 연산만 반복하는 교재를 사용하기보다 처음 수학에 대해 배울 때 흥미를 더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다른 P 영재학원은 유치원생도 응시할 수 있는 한국수학학력평가(KMA) 준비를 주로 내세운다. 이 학원 앞에는 자체적으로 실시한 수학 연산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6~7세 학생들을 리스트업해 놓는 식으로 홍보한다.
알고 보니 핵심은 ‘문해력’이었나…치열한 ‘논술학원’ 대기
영어와 수학 등 주요 과목 학원가만 치열한 게 아니다. 요즘 대치동 부모들 사이에선 “다른 학원은 안 다녀도 여기는 다녀야지”라고 하는 학원이 있다. 바로 독서 논술학원이다.
몇 년 새 맘카페 등 대치동 부모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주제는 “우리 아이 문해력을 어떻게 키우느냐”다. 높은 수준의 이해력이 필수인 사고력 수학의 특성만 고려해도 논술에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문해력을 키워주고자 독서와 글짓기·토론·사고력 수업을 위주로 진행하는 학원들은 대기가 최소 1~2년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수십 년 전부터 명실상부 톱학원은 1988년 대치동에 터를 잡고 30여년 넘게 운영 중인 문예원 글로피아다.
어린이와 청소년기에 독서와 글쓰기로 완성되는 세계관을 갖추고 인문학적 소양과 맞춤화된 교육을 행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조리 있게 말하는 역량을 얻어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부모들에 따르면 이 학원은 대치동 논술학원 중 대기가 가장 긴 편으로,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대기를 걸어야 입학 가능’하단 말이 나올 정도다.
문예원은 미취학 아동 특화 학원인 ‘글로아이’를 따뤄 뒀다. 학원 측은 “언어 발달이 급격히 이뤄지는 유아기(4~7세)에 그림책은 읽기·쓰기·말하기·듣기의 언어학습과 인지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며 “유아기 성장 발달 단계에 맞춰 선정된 책들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독서를 재미있게 대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2007년에는 논술화랑이 양대 산맥으로 떠올랐다. 이곳은 유아부터 독서지도, 논술, 한국, 세계사, 고전, 토론 등 수업을 한다.
이에 대항해 2012년 생겨난 지혜의숲은 전국에 지점을 두고 있는 학원으로 몸집을 불렸다. 부모들을 위한 온라인 특강을 주기적으로 진행하기도 한다.커리큘럼도 단순 독서 논술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 예술과 철학을 접목한 교육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2020년 생긴 페이지바이페이지는 CMS 영재사고력 수학과 청담어학원 등을 만든 교육기업 크레버스에서 개원한 학원으로 부모들의 눈길을 끌었다. 6세 아이를 이 학원에 보냈다는 한 부모는 “대형 프랜차이즈답게 도서관 시설이 잘돼 있고 이러닝(온라인 학습)을 주로 하는 곳이라 태블릿 사용해서 학부모들 사이 호불호가 나뉘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수십 년 전부터 자리를 잡은 학원들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가 하면, 최신 교육 스타일을 반영한 특화 학원들도 성행한다. 하지만 모든 대치동 부모가 같은 방식으로 사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건 아니다.
대치동에서 10년간 입시컨설팅을 해온 한 전문가는 “어릴 때부터 무작정 학원을 많이 보내는 게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지 않는 부모도 많다”며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이 돼서 공부 효율이 오히려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대치동 학원가도 단순 학습량을 늘리기보다, ‘성취욕’과 ‘풍부한 창의력’을 키워주는 데 주력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의 사교육비 대책에도 사교육비는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의 격차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들 사교육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은 사교육으로 대표되는 대치동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대치동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해 매주 월요일 게재합니다. 대치동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스템을 모르면 한국 교육의 업그레이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치동이 어디인지, 대치동의 왕좌는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학생, 학부모, 강사들의 삶은 어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치동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거나 포털에서 [대치동 이야기]로 검색하면 더 많은 교육 기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