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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포항 지나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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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6월인데 8월 날씨 같다고 아침뉴스가 알려준다. 기후변화가 장마의 모습을 예측 불가하게 바꾸고 있다는데, 누군가는 장마 일기를 쓰고 있을까? 그리워진 다음이라면, 그 일기 읽어보고 싶겠다. 빗소리처럼 오는 매미도 있고 빗소리처럼 죽는 벌레들도 있는 날들이 어떻게 모양을 바꾸며 여름 안에 머물렀을지 내가 모르는 장면이 가득하지만,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새 시집을 출간하면서 낭독행사가 부쩍 늘었다. 며칠 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초청 낭독회를 다녀왔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고1 때 나를 만난 고3 학생은 2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기억이란 이렇게나 불공평하다.

낭독회 전엔 교감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졸업앨범을 봤다. 교감 선생님은 나의 고1 담임선생님이었는데 내가 그 시절에 누구와 어울려 다녔는지도 아셨다. 내 기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한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짚으며 물으면, 선생님이 기억하는 몇몇 순간들 덕분에 따뜻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의 책이 화제였는데, 포항 영일고등학교 최고의 베스트셀러 <삶의 斷想> 뒤표지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직 생활하면서 낙서를 많이 해 놓은 것을 용기 내어 엮었습니다. 이소연 시인의 말씀이 감명 깊어서. 나중에 학교 오면 드릴게요.” 문자가 왔다. 지난 4월에 출간된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를 읽고 나서의 일이란다. “많은 사람이 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삶이 가치 있는 거라고 믿는다.”는 이 한 문장 때문에 용기를 냈다고. 바라는 삶은 이렇게나 좋은 것이구나 싶었다. 어느 한순간,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하루를 살게 해주니까.

교장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많이 웃었다. 교장 선생님은 부임 초기 단골 1학년 담임이었던 모양이다. 1학년 학생들과의 사투 끝에 겨우 정리 정돈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글 말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1학년 담임을 좀 벗어나고 싶은데 교감, 교장 선생님은 아직 배정해 주시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웃음을 꺼내오는 선생님의 문장이 투명하고 그립다.

“옛날 어머니 찾아 푸르른 청송 갔다/ 청송 지나 계속 눈 비비며 청송 갔다”는 이영광 시인의 청송이란 시가 훅 끼쳐 든다. 나도 그리움에 사무쳐 도저히 복원할 수 없는 기억의 한편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온 것일까? 산과 강과 들판의 풍경이 바뀌었음을 알겠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정년을 앞두고 있다. 그립다. 젊은 나의 옛날 선생님 찾으러 포항 지나 계속 눈 비비며 포항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기억하려는 나와 망각하려는 내가 뿔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일이 아닐까?

도서관에 들어서자, 선배가 왔다고 환호하며 반긴다. 게시판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지가 붙어 있었다. 6월에 나온 시집 <콜리플라워>를 읽고 남긴 것이다. 학생들은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나 잘 알까? 나도 궁금했던 걸 학생들이 물어봐 줘서 대답해 본다. 대답하면서 깨닫는다. 내가 어떤 시를 가장 마음에 두었는지. 어떤 시를 읽고 싶어 하는지.

낭독회를 마치고 기차 안에서 서명받는 중에 “저도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냐고 물으며 시작하는 긴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이제 이 학생을 잊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물으면 내 기억 덕분에 따뜻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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