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시장경제가 사회주의 경제보다 왜 나은지,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논의가 부족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지식인들이 근본적인 성찰을 할 때입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러시아 대사)는 지난 3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인간에 대한 교육, 인문교육을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내 1호 러시아사 박사(미국 하버드대)로 고려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이 명예교수는 여성 1호 대사(핀란드·러시아)와 KBS 이사장,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등을 거쳤다. 대표적인 보수 인사로 꼽히는 그는 최근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10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을 거뒀습니다. 여당의 패배가 아닌 보수의 위기, 자유주의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보수나 진보 같은 낱말들은 (원뜻과 달리 오용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보수라는 용어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력’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왜 소중한 것인지와 같은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지식인과 정치인의 차이를 대표하는 특성은 각각 타협과 방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달리 말하면 ‘이권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다 보니 원칙에 어긋나는 타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지금 급해서 하는 일이지만 옳은 일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심어주는 게 지식인의 역할입니다.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이상과는 괴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것은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기득권이 나태해지고, 부도덕해지면 이를 지적하는 반항자 역할이 지식인이 맡은 일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말씀하셨는데, 요즘은 지식인이라는 표현부터 낯설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습니다. 1980년대 지식인 논의가 잠깐 일었지만 결국 겉돌았습니다. 한국 지성계, 지식계의 존재감이 옅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지성계가 정치에 휘말려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 이유 중 하나는 기성세대가 민주 국가를 운영할 만한 훈련을 받지 못했고, 경제적 기반도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야 하는 과정에서 착오도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외부의 영향 없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켰던 영국 같은 나라와 달리, 우리는 소위 ‘후진국형 발전’을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고 사회의 여러 부분이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게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를 설명하는 배경이 된다고 봅니다.”
▶지식인 사회의 뿌리가 얕은 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로 나타납니까.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직접 몸담은 세계 외에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깊게 보게끔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그 역할을 못 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기르려면 꾸준히 오랜 시간 연마해야 하는데 그럴 여건이 못됐던 영향입니다. 1970~1980년대 대학에서 정치 이슈로 날마다 데모하고 공부를 못한 탓에 공백이 엄청나게 크게 생긴 것입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민주화에 기여했다’고는 하지만 표면적으로 제도화 측면에서 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민주화의 내용을 채우는 준비에는 부족했습니다. 그 대가를 지금 비싸게 치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도 선전 선동이 지식인 줄 아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 채 그런 공백 속에서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교묘하게 힘을 키웠습니다. 지금 남남갈등이라고 하는 것의 배경에는 이런 역사가 있습니다.”
▶소위 ‘86세대’가 교수님께서 말한 문제점이 응축된 세대로 보입니다.
“사회가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현실 속 발전이 너무 뒤처진 탓에 파열되는 게 혁명입니다. 그렇게 혁명이 일어났지만,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는 게 러시아에서 판정이 났습니다. 하지만 고통당하던 시기에는 혁명이 대안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우리도 그 유혹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누적된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한국 사회의 잘못된 점을 고치려면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인간이 짐승같이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라 좋다는 것을 체득할 수 있게 하는 게 국민 교육의 기본입니다. 경쟁에는 서로 잘되기 위한 선의의 경쟁과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하는 경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 정책을 맡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일제 시대 때 학교에 다녔고, 6·25 전쟁 때 중고등학교를 거쳤는데 대학에 진학하는 데에는 반 등수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는 의식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틈에 상대평가를 해서 그것을 진학의 기회와 직결시킨 것이 한국 교육의 패착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잘되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필요한데 그런 훈련이 현저히 부족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합니다.”
▶현충일을 앞두고 국가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꾸준한 독립운동을 통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던 국가들에 ‘한국이 독립국가가 될 열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시켰던 인물입니다. 그들이 힘을 보태 독립국가를 만들었고 자유 민주주의를 담은 헌법을 제창했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소중하고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들였던 분입니다. 인간의 소중함, 개별 인격의 소중함이 최고 가치이고 그걸 어떻게 잘 제도적으로 담아내느냐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이를 마련한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말 진정한 혁명은 건국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국 과정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민주 체제에 내실을 채우는 작업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사이에 착오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에 민주 공화국의 가치가 정말 빨리 정착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건국을 이룬 이승만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보다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국민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부정을 저지른 분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4·19 의거’ 당시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분노한 것을 ‘참 자랑스럽다’고 칭찬을 했던 분입니다. 어떤 독재자가 그런 감정을 갖겠습니까. 거꾸로 된 인식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은 반공과 친공의 싸움을 품고 태어난 나라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이 시작된 1923년에 하와이에서 쓴 논문에서 공산주의가 이론부터 틀렸다는 것을 밝힌 분입니다. 그때 이미 ‘공산주의의 강점은 노동하는 절대다수가 평등하게 잘 사는 것이라는 이상이다. 하지만 기업을 적대시하고 지식인을 홀대하면 노동하는 절대다수가 잘 살 수 있는 창의력이 나올 수 없다’고 설파했습니다. 당시 세계 지식인 중에서 공산주의의 성격을 그렇게 명확하게 파악한 분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측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만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태어날 수 없었다고 보기에 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역사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에 집중했고 그 영향이 미친 것이라고 봅니다.”
▶일종의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는 것인지요.
“소위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했을 때 독재자로 지목됐던 것은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자로 부상했습니다.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에 호소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몹시 나쁜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공산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선전과 선동이 생명선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차르치하에서는 법망을 피하기 위해 이중언어 등 고도로 발달된 속임수를 썼고 혁명후에는 마르크스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한 경제적 후진국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거짓 선전 선동, 특히 역사왜곡을 체제의 생명선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옛 소련에서 가장 머리좋은 사람들을 대거 투입해서 선전 체제를 가동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을 조종하는 것이 실력대결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대사 등 외교관으로도 활동하셨는데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양국 관계가 해소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우크라이나라고 하는 정치 체제에 러시아가 옛날 같은 영향력을 미치느냐, 아니면 미국 등 서방국이 미치느냐의 싸움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예전 대(大)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남아있고 기존의 러시아 연방마저 해체될 수 있다는 공포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를 강화하는 길을 택했고요. 결국 어느 쪽이 먼저 지치느냐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러시아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중요한 이웃이기 때문에 한·러 관계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담=김동욱 오피니언 부장/정리=이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