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대만…인생 커피를 만나다

송골송골 맺힌 땀이 셔츠에 서서히 젖어 들 즈음, 자동문이 열렸을 때 느껴지는 서늘함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붉은 벽돌의 유럽풍 건물은 한때 소학교 건물이자 옛 대만 타이베이 시청 청사, 수차례의 개조와 복원을 거쳐 지금은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이 됐다. 전시관에는 때마침 미디어 아티스트 수 후이유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1970년대 전후 대만 계엄령 시대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다각도로 재조명하는 멀티미디어 작품들. 오픈소스와 인공지능(AI) 툴을 활용한 이 작품들은 여전히 그때와 비슷하게 정체성과 이념 등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화해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작품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낯설지 않다고 느껴진 것은 그 역사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대만의 커피를 둘러싼 이야기도 우리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80~90년대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깃사텐 분위기의 카페와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는 장인(마스터)들이 커피문화를 주도했다. 90년대까지 이어진 경제 성장으로 커피가 대중적인 음료가 되면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인 1998년에 스타벅스 1호점이 대만에도 문을 열었다.

2000년대부터는 스페셜티커피 흐름의 영향을 받아 보다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전문 바리스타와 로스터 등이 산업을 이끌었다. 빠르게 성장한 스페셜티커피 산업을 기반으로 2016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에서 바리스타 버그 우가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1년 만인 2017년에는 또 다른 스타 바리스타 채드 왕이 월드브루어스컵에서 왕좌에 올랐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 부산 모모스 커피의 바리스타 전주연이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오랜 커피 역사에서 늘 ‘비주류’로 여겨진 아시아 커피시장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지난 1일부터 나흘간 아시아 대륙 최초로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월드 오브 커피’도 하나의 증거다. 전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와 로스터, 커피업계 관계자가 모여 커피의 미래를 그렸다. 대만 카페 여행에서 만난 바리스타 청년들, 그리고 부산을 뜨겁게 달군 세계 커피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시아 커피시장의 달달한 꿈을 함께 그려 보기를.

"커피를 마신다는 건…삶의 순간을 깊이 음미한다는 것"
커피 in 아시아 - 부산 달군 '월드오브커피'

5월 초 부산에선 ‘커피의 세계’가 열렸다. 세계 각국의 커피가 한자리에 모이는 ‘월드 오브 커피’, 그리고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이 부산 벡스코에서 1일부터 나흘간 이어졌다. 월드 오브 커피는 글로벌 기구인 스페셜티커피협회(SCA·Specialty Coffee Association)에서 주최하는 박람회. 매년 대륙별 2~3곳의 도시에서 개최되는데, 각각의 행사에 SCA에서 주관하는 7개 종목의 커피 대회가 나뉘어 열린다. 올해에는 아시아 대륙 최초로 부산 벡스코에 상륙했다.


“커피, 먼저 눈 감고 느끼세요”

각국을 대표하는 바리스타가 나흘간 치열하게 경연을 펼친 끝에 인도네시아 국가대표 미카엘 자신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00년부터 열린 WBC에선 10여 년간 북유럽과 영국, 호주 등에서 챔피언이 줄줄이 나왔지만 최근 들어 일본(이자키 히데노리·2014년), 대만(베르그 우·2016년), 한국(전주연·2019년) 등 아시아 바리스타가 속속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 챔피언인 자신은 2012년 우연히 호주 멜버른의 카페를 방문한 뒤 커피에 빠져들었다.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경력을 쌓은 그는 2017년 고국인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빠르게 성장하는 개발도상국의 커피시장에서 더 큰 바리스타로 성장하고 싶다는 열망이 작용했다.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커피 농장이 있는 손꼽히는 커피 산지라는 점도 큰 이유였다.

호주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은 2018년과 2019년 연거푸 인도네시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고, 2019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대회에서 인도네시아 커피를 들고 결승에 진출해 4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대회가 주는 부담감에 ‘번아웃’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자신은 그 마음을 달래준 ‘마음챙김(mindfulness)’과 ‘명상(meditation)’을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꾸렸다.

그는 심사위원들이 커피를 마시기 전,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눈을 감게 했다. “순간에 집중해 마음을 챙기고, 마음과 영혼, 몸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은 커피 마실 때는 물론 삶의 순간에도 중요하다”는 말에 심사위원과 관객 모두 깊이 공감했다.


아시안 바리스타의 급부상

자신은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월드 챔피언이자, 아시아의 네 번째 챔피언이 됐다. 하지만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그의 커피 인생을 살펴보면 월드 오브 커피에서 국경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자신의 프레젠테이션에는 호주에서 쌓은 경험은 물론 무섭게 성장하는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함께 실력을 기른 팀원들의 노력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커피 중 하나는 ‘파나마 핀카 데버라’에서 왔다. 이 농장은 플로리다에서 금융업에 종사했던 미국인 제이미슨 사비지가 파나마로 이주해 차린 것으로, 가장 최신의 커피 가공 기술을 다루는 농장이다. 그야말로 ‘세계의 커피’가 한데 모여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 셈이다.

WBC는 2000년 모로코 몬테카를로에서 12개국의 바리스타가 참여하는 작은 이벤트로 출발했다. 15분 내에 에스프레소와 밀크 음료, 창작 음료를 4잔씩 제조하는 이 경연은 시작된 이후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바리스타들의 훈련 도구가 돼 왔다. 매년 열리는 대회 규정은 조금씩 변화했는데, 이를 통해 에스프레소 추출과 관련된 각종 절차부터 카푸치노 등에 올리는 우유 거품에 대한 규정까지 산업의 표준을 만들었다. 대회에 출전하는 바리스타들은 정해진 규율 속에서 더 맛있는 커피를 내리기 위해 고민해 대회마다 새로운 혁신을 선보였다.

이 혁신으로 지금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과거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했다. 가령 2007년 챔피언 자리에 오른 제임스 호프먼은 그동안의 관행처럼 여러 종의 커피를 섞은 블렌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생산 과정을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개성 넘치는 향미를 가진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선보였고, 이후 세계 커피시장에서는 싱글 오리진 커피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2014년 맥스웰 콜로나-대시우드는 커피 추출수(물)의 성분을 분석했고, 2015년 사사 세스틱은 탄소침용 커피를 선보여 커피업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커피의 혁신은 WBC로부터

올해도 그동안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바리스타들이 만들어낸 추출 기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세스틱이 만든 ‘파라곤 칠링 록’은 에스프레소의 휘발성 유기 화합물질을 추출물에 응집하는 역할을 한다. 결선에 오른 몇몇 바리스타는 이 도구를 적극 활용해 추출한 에스프레소의 향미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2013년 호주 바리스타 챔피언이자 커피 교육컨설팅 업체 바리스타허슬 대표인 맷 퍼거의 신제품도 큰 활약을 했다. 분쇄된 커피를 고르게 분포해 추출 효율을 극대화하는 장치인 디스트리뷰션 툴 ‘오토콤브(Auto Comb)’는 출시 1년 만에 많은 선수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무대를 장식한 이 장치들은 곧 우리 일상의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드는 요소로 점차 퍼져나갈 것이다.

역대 세계 챔피언과 전 세계 커피 회사 관계자들은 최신 기술을 적용한 다양한 신제품과 기술을 들고 부산을 찾았다. 행사장은 나흘간 인산인해였다. 커피인들이 모였으니 다양한 협업 이벤트도 펼쳐졌다. 행사를 전후해 한 달여간 전국에서 각국 바리스타 대표가 시연회를 열거나, 유명 커피 브랜드와 팝업 행사를 열었다. 커피인들과 행사 주최자들이 모여 도심을 함께 달리는 ‘월드 오브 커피 러너스’도, 경연에 나선 모든 선수와 관계자들이 함께 모이는 파티도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대회장을 찾아 수개월을 쉼 없이 연습한 국가대표들의 경연을 보면, 잘 알지 못하는 선수의 시연에서도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커피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작은 움직임이 이제는 전 세계 커피인의 마음을 뛰게 하는 것이다. 금액으로 경제효과를 따지기에는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월드 오브 커피에 있었다.

골목마다 발길 붙드는 커피향…달콤쌉싸름한 타이베이의 맛
커피 in 아시아 - 스페셜티 순례지로 떠오른 대만

데칼코마니와도 같은 대만과 한국의 커피 역사. 그 속에서 서로 다른 점을 꼽자면, 대만은 아시아에서도 손에 꼽히는 커피 산지라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포르투갈어로 아름답다는 의미의 ‘포르모사’라는 이름이 붙은 대만을 호시탐탐 노리던 유럽 상인들은 커피를 들여와 땅에 심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1000㏊에 달하는 지역에서 커피 재배가 이뤄졌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세계대전, 독립 이후의 사회 갈등으로 커피 문화가 쇠퇴하며 재배 규모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커피 재배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 커피가 대중화되면서부터다. 대만 정부가 전략적으로 커피 농가를 지원하고 육성한 것인데, 그 덕분에 지금 대만에서는 고품질의 스페셜티 커피가 생산되고 있다. 대만의 스페셜티 커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무대에서 우승한 두 챔피언-버그 우 & 채드 왕-의 성장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노점커피 VS 유학파, 대만의 두 챔피언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대학생이던 버그 우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직접 커피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2000년부터 시작한 커피 제조는 석사 과정을 밟을 때까지 이어졌고, 이후에는 세발자전거에 간이 카페를 설치하고 시장에 나가 커피를 팔기도 했다. 점점 성장하는 커피 시장을 목격한 버그 우는 2011년 카페 ‘심플 카파(Simple Kaffa)’를 설립했다. 그는 20여 년간 전통적인 핸드드립 추출에서 에스프레소 추출까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실력을 길렀다. 여덟 번이나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에 출전해 결국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심플 카파를 찾으면, 그를 쫓아가려는듯 보이는 동료 바리스타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에 일렬로 선 바리스타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킷사텐의 현대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 우가 전통적인 커피 추출부터 시작한 올드스쿨 출신이라면, 채드왕은 해외에서의 다양한 경험으로 자신만의 커피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12세부터 유학길에 오른 채드 왕은 영국에서 유학하며 식품영양학을 공부한 유학파 바리스타다. 그는 커피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을 결심하고, 세계 유명 커피인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쌓고 실력을 키워갔다.

스페셜티커피 산업이 태동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더욱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커피를 다룬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테크닉을 기른 채드 왕은 곧 월드브루어스컵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우승한 이후인 2018년 그가 타이베이 시내에 문을 연 카페 브이더블유아이 바이 채드왕(VWI by Chad Wang)은 마치 고풍스러운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곳의 직원들은 더욱 여유로운 태도로 고객들과 대화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하고 그 방식을 뽐내며 커피를 추출한다.

편의점에서 야시장까지 ‘카페 천국’

물론 이 두 카페의 모습만으로 대만의 커피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보다 보편적으로 대만의 커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편의점을 빼놓을 수 없다. 대만의 많은 젊은이는 더위를 피해 24시간 문을 여는 세븐일레븐 등의 편의점을 찾는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들의 피로를 덜어줄 커피가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이외에도 식당이 즐비한 지하상가나 아케이드 한편에 있는 카페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만은 야시장과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주를 이루고, 그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양질의 음식이 도시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된다. 현금 위주의 이 시장은 한편으로는 회색 경제라는 비판도 받지만, 단단하고 든든한 그 식당들이 있어 사람들은 언제나 편하게 배를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타이베이에는 그 식사에 어울리는 편의점과 아케이드 커피가 성행하고 있다.

화분에 담긴 ‘분재 커피’ 아시나요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보면 지하철역 입구 모퉁이 상가에 있는 카페 신드(SIND)가 가장 대만스러운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재 커피’로 유명한 이 카페에서는 화분이 있는 트레이에 커피가 담겨 나온다. 대체로 요즘 대만의 상점들은 덥고 습한 날씨에 대비해 냉방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사방이 뚫린 지하철 입구 상가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는 선풍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 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을 찾아와 커피를 마신다. 그때마다 바리스타는 분재 화분을 준비하고, 세계 곳곳의 커피 산지에서 엄선한 스페셜티 커피를 정성스럽게 내린다. 후끈한 바람이 불어오는 골목길 상점에서 땀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후루룩 들이켠 그 뜨거운 커피는 가장 타이베이다운 맛이었다.

타이베이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우리나라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다. 식당에 들어서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먹을 것을 내어주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기뻐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잘 먹고 힘내라는 소리 없는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복잡한 현대사를 이겨낸 타이베이의 이면에는 그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음식과 커피가 있지 않았을까.

글·사진/타이베이=조원진 커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