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30일 09:2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커머스업계에서 거래액(GMV)은 기업가치를 산정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활용된다. 적자 일색인 e커머스업체의 성장세를 확인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신세계그룹과 사모펀드(PEF)가 기업공개(IPO) 조건뿐 아니라 GMV를 SSG닷컴 풋옵션 발동 기준으로 삼은 이유다.
e커머스 시장의 점유율을 산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직매입 방식(1P)과 오픈마켓 방식(3P)의 매출 인식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수료를 받는 오픈마켓 매출을 직매입 기준으로 환산해 합친 값이 일반적인 GMV다.
SSG닷컴 '1조원 풋옵션' 분쟁의 핵심은 GMV 범위에 있다. 구체적으로 자사 상품권이 GMV에 해당되는지에 있다. 지난해 신세계그룹은 이례적인 상품권 할인 판매를 통해 SSG마켓 상품권 매출을 대폭 늘렸다. PEF 측은 상품권의 매출 중복 카운팅 문제는 둘째치고 주주간계약서에 제시된 GMV 기준에 SSG마켓 상품권이 해당될 여지가 없다고 설명한다. 반면 신세계그룹은 자체적으로 GMV 산출할 때 SSG닷컴 상품권을 포함시켜왔다고 항변하고 있다. 양측은 강대강으로 맞서고 있어 소송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자체 상품권 거래 빼면 풋옵션 발동
3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SG닷컴의 대주주인 신세계·이마트와 재무적투자자(FI)인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BRV캐피탈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핵심 쟁점은 SSG닷컴 상품권 판매 대금의 GMV 인정 여부다. 양측은 1조원 규모의 투자 계약을 맺을 때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SSG닷컴의 GMV가 2023년 5조1600억원을 넘지 않으면 FI가 풋옵션(주식매도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계약이다.양측은 GMV 산정 조건을 계약서에 명확히 담았다. SSG닷컴이 직매입하는 제품의 매출과 SSG닷컴에 입점한 업체가 판매한 제품의 매출 등 실질 거래만 GMV로 계산하기로 했다. PEF 측은 SSG닷컴에서 발행한 상품권은 직매입한 제품도 아니고, 입점업체가 판매한 제품도 아니기 때문에 이 상품권 판매는 실질 거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GMV 산정 조건을 엄밀하게 설정한 이유는 자사 상품권 매출 등으로 손쉽게 GMV 부풀리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10만원짜리 SSG닷컴 상품권을 구매한 뒤 SSG닷컴 내 이마트몰에서 10만원어치의 신선식품을 구매하면 거래액은 20만원이 된다. 실질적으로 SSG닷컴을 통해 팔린 상품은 10만원이지만 거래액이 두 배로 부풀려진다.
SSG닷컴이 지난해 상품권 판매로 거둔 매출은 3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매출을 GMV에서 제거하면 SSG닷컴의 2023년 GMV는 5조1600억원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경우 풋옵션 발동 요건이 유효해 FI는 다음달 1일부터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
거래액 늘리려 상품권 '파격 할인'
SSG닷컴은 GMV 산정 조건이 명확한 주주 간 계약을 맺었음에도 자사가 발행한 상품권의 판매 대금도 GMV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e커머스산업의 성장세가 정체된 데다 쿠팡과 네이버쇼핑 등 경쟁자들이 치고 나가면서 SSG닷컴의 거래액이 좀처럼 늘지 않자 고육지책으로 상품권 매출도 GMV에 포함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세우고 거래액을 부풀리는 전략을 써온 것으로 보인다. 신세계그룹은 신세계와 이마트의 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을 같은 논리로 설득해 사업보고서를 통해 풋옵션 발동 요건이 해소됐다고 공시하고, 금융부채도 제거했다.SSG닷컴은 지난해 자체 발행한 상품권을 3%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폈다. 할인율을 최대 5%까지 끌어올리는 이벤트도 종종 열었다. 상품권 발행사가 권면 가격에 3~5%를 할인해 판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모든 제품을 3~5% 할인 판매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SSG닷컴 상품권은 SSG페이에 등록하면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등 신세계 계열사에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신세계백화점 상품권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상품권 환전소에서 신세계백화점 할인율이 3%대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5% 할인은 파격적인 조건이다.
파격 할인 덕에 지난해 알뜰 소비자들 사이에선 'SSG닷컴 상품권 재테크'가 유행하기도 했다. 재테크 방식은 간단하다. SSG닷컴이 자체 발행한 상품권을 특가에 팔면 이를 우선 대량 구매한다. 이후 SSG닷컴을 통해 이마트나 백화점의 '노세일' 상품을 구매하는 식이다. 신세계그룹 입장에선 손해를 보는 일이지만 SSG닷컴은 공격적인 상품권 할인 행사를 이어갔다. IB업계에선 신세계그룹이 1조원 규모의 '풋옵션 시한폭탄'을 막기 위해선 손익보다 상품권 매출을 통해 SSG닷컴 거래액을 늘리는 데 공을 들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법정 공방으로 번질 가능성 높아
신세계그룹과 FI는 다음달 1일 풋옵션 행사 시작일을 앞두고 풋옵션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양측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어피너티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SSG닷컴에 투자할 때 조달한 인수금융 만기가 한두달 안에 도래하기 때문이다. SSG닷컴의 상장이 당분간 어렵고, 기업가치가 곤두박질친 만큼 리파이낸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펀드 출자자(LP)들에게 선관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풋옵션이 유효하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해야 한다.신세계그룹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당장 1조원 규모의 풋옵션을 받아줄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서다. 풋옵션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면 공시 위반과 회계처리 위반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풋옵션 유효성 인정된 가운데 FI의 풋옵션을 받아주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엔 FI가 신세계그룹이 보유한 SSG닷컴 지분까지 가져가 동반 매각을 할 수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신세계그룹은 물론 FI도 벼랑 끝에서 서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만큼 합의가 이뤄지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풋옵션 유효성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