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반도체 전쟁이 벌어진 지 1000일째 되던 날 미국 증시에서 반도체 주가가 급락했다. 그 원인은 반도체 전쟁의 역사로 되돌아가 봐야 한다. 전쟁의 발단은 중국이 먼저 제공했다.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팍스 시니카 구상의 일환으로 ‘제조업 2025 계획’을 추진했다. 목표 시한인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는 반도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중국 정책의 근간인 나바로 패러다임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 구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책사로 불린 피터 나바로 무역제조업국장은 중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미국을 따라올 수 없다는 전제하에 산업정책을 추진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트럼프 정부 4년 내내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경한 대중국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경제력 격차는 좁혀졌다. 골드만삭스 등은 2050년이 넘어서야 가능할 것으로 내다본 미·중 간 경제력 역전 현상이 2027년으로 앞당겨질 것이란 예상을 내놓았다.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은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
‘미국의 위기’ 속에 조 바이든 정부가 출범했다. 최우선 대선 공약인 기후변화 대책을 뒤로하고 2021년 7월 말부터 제조업 부활 대책을 추진했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산업 대책은 중국의 전유물인 ‘굴기’라는 명칭을 붙여 맞대응했다.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이 본격화한 것은 이때부터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정책 근간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주도한 ‘설리번 패러다임’이다. 나바로 패러다임과 달리 미국의 기득권을 십분 활용한 대책으로 효과를 봤다. 트럼프 정부 마지막 해에 10년 이내로 좁혀졌던 중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다시 30년 이상으로 벌어졌다. 첨단기술 제품도 부가가치가 높을수록 격차가 더 벌어졌다.
중국 경제는 위기 상황을 맞았다. 대미국 수출이 막히면서 모든 경기부양책을 동원해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제정책 무력화’ 명제에 빠졌다. 중국 경제의 앞날을 낙관적으로 보는 내부의 시각과 달리 조만간 디플레이션 국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것이 서방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시 주석은 더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미국과의 경제 패권 다툼에서 밀려 자신의 팍스 시니카 구상이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일대일로 계획의 초기 참여국인 스리랑카와 파키스탄이 부도를 맞으면서 위안화 국제화 과제까지 흔들리고 있다. 시 주석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 카드는 ‘디플레 수출’이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표방한 이후 고도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노동집약적 제품을 중심으로 펼친 디플레 수출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국은 첨단기술을 제외한 모든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윌리엄 페색(블룸버그 칼럼니스트)이 경고한 차이나 쇼크가 현실로 닥쳤다.
최근에 시 주석이 택한 디플레 수출 대상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제품이다. 미국 제조원가의 최대 70%를 넘지 않는 점을 활용해 덤핑 수출로 미국 첨단기술산업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전략이다. 팍스 시니카 구상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위안화 절하 카드까지 동원하겠다는 것은 원화 절하로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중국의 2차 디플레 수출에 대한 미국의 고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국의 첨단기술산업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와 다른 하나는 위안화 절하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두 과제 모두 미국 국민의 자존심과 직결된 만큼 대선을 향해 가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창구인 무역대표부(USTR)는 이미 경제 패권과 연관된 첨단기술 제품일수록 고관세를 부과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위안화 절하에 대해서는 조만간 발표할 환율보고서에서 중국을 ‘환율심층대상국’(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100% 보복관세를 때리는 슈퍼 301조를 발동할 수 있다.
바이든 정부의 대외 통상정책은 주요 현안별로 유사 동맹국(like minded countries)과 공동 대응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국제통화기금(IMF) 2024 춘계 총회를 앞두고 열린 한·미·일 재무장관 회의에서 ‘중국 디플레 수출 공동 대응’과 ‘외환 공조’에 합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결과다.
과연 중국이 한국에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두 대국에 낀 우리 경제 처지에서는 대외정책이 너무 미국으로 쏠리다 보면 중국으로부터 보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중간자 국가의 대외정책은 ‘항상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생명이라는 점을 현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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