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09일 14:2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포스포럼은 AI 낙관론으로 넘쳤습니다. “AI는 향후 10년 내에 전 세계적으로 연간 4조 달러의 생산성을 창출할 것이다” (IBM 최고경영자), “당신이 AI를 받아들이면 당신은 완벽해지겠지만, AI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늦게 받아들인다면 끝장날 것이고, AI를 완전히 거부할 경우 당신은 완전히 끝나버릴 것이다” (UAE AI·디지털경제장관)라며 유명 인사들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온 ‘글로벌 리스크 리포트 2024’에 따르면 전 세계 전문가가 꼽은 올해 인류 최대의 위협으로 기후변화를 꼽았습니다. 그 다음은 인공지능(AI)이었습니다. 올해 전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선거에서 유포될 허위 정보 때문입니다.
기후위기와 AI는 이제 하루도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기후변화는 인류 고유 문명의 산물로 지난 200년간 과학과 기술이 폭발하며 인류의 삶의 질을 높였던 원동력이었지만 앞으로는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반면 AI는 인류에게 적이 될지 아니면 친구가 될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신기술은 늘 경제와 사회 구조까지 변화시키지만, 이제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의 뇌까지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후위기와 AI는 닮은꼴입니다. 기후위기는 인류의 생존을, AI는 인류의 존재 이유를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가들의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AI의 충격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특히 1년 반 전 등장한 생성형 AI 이후 AI 기술은 전혀 또다른 차원으로 진화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 등장한 휴머노이드 로봇 ‘피규어01’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로봇은 생성형 AI 선도 기업 오픈AI의 기술이 탑재된 것으로, 먹을 것(사과)을 골라내고, 쓰레기를 치우고, 식기를 정리하는 등 사람을 흉내냅니다. 게다가 로봇 ‘자신’의 행동 동기에 대해 경험적 추론까지 해냈습니다. 생성형 AI의 핵심인 대형언어모델(LLM) 때문입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자 제일 먼저 자본시장이 반응했습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 기사(Just how rich are businesses getting in the AI gold rush?)를 인용해보겠습니다. 델(Dell) 주가는 단 하루만에 3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클라우드 컴퓨팅 스타트업 투게더 AI(Together AI)는 기업가치가 작년 말 5억 달러에서 지난달 13억 달러로 치솟았습니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가 등장했던 재작년 10월 3천억 달러에서 지난달 2조 3천억 달러로 거의 여덟 배나 치솟으며 애플까지 넘볼 기세입니다. 과연 AI 시대에서 누가 진정한 승자가 될까요?
AI 생태계는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 모델 메이커(AI 자체), 클라우드 컴퓨팅, 하드웨어(반도체, 서버, 네트워크 장비)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분석 대상인 100여 개 기업의 주식가치가 지난 1년 반 동안 8조 달러, 원화로 1경 원 이상 늘었습니다. 아직까지 클라우드 컴퓨팅 시장가치가 가장 크나 증가 규모는 1.5조 달러에서 5조 달러로 증가한 하드웨어가 압도적입니다. 이는 기술 붐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소프트웨어가 제공되려면 물리적 인프라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붐 때 모뎀과 통신기기 업체 시스코와 월드컴이 그랬습니다. 지금 최고의 승자는 엔비디아로, 시가 총액 증가액 중 57퍼센트를 차지하고, 전체 AI 칩의 80% 이상을 생산합니다. 이런 엔비디아를 가만 둘리 없습니다. AMD, 인텔 등 레전드 반도체 강자와 그로크(Groq, 초고속 AI 칩)와 세레브라스(Cerebras, 초대형 AI 칩) 같은 스타트업들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빅3도 마찬가지입니다.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것이지요.
모델 메이커는 약 1,400억 달러로 다섯 배가량 급증하였습니다. 생성형 AI의 효시인 오픈 AI를 비롯하여 앤트로픽(Anthropic), 미스트랄(Mistral), 임뷰(Imbue), 코히어(Cohere) 등이 그런 곳들입니다. 모델 메이커가 등장하면 다양한 수요자를 상대로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이 만개합니다. 줌(Zoom, 화상회의), 서비스나우(ServiceNow, IT 문의), 어도비(Adobe, 사진 편집), 딥스크라이브(DeepScribe, 의료), 하비 AI(Harvey AI, 법률자문)가 대표적입니다.
클라우드는 거인들의 마당입니다. 1년 반 동안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의시가 총액은 2.5조 달러가량 늘었습니다. 엔비디아가 주도하고 있는 하드웨어에 비해 증가 규모와 증가율이 뒤쳐지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최고의 승자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들은 엄청난 데이터와 전문인력, 컴퓨팅 성능, 자금 등 최첨단 AI 시스템 개발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기업들은 AI 서비스를 기술이 검증된 이런 거인들에 대부분 의존합니다. 그리고 빅3는 칩 설계는 물론이고 모델 메이커까지 AI 생태계 전체를 지배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서구 거대기업 주도의 AI 경쟁에 석유 부국도 뛰어들고 있습니다. UAE 7개 에미리트 중 하나인 아부다비 정부와 기업들은 AI가 ‘넥스트 오일’이라며 석유로 번 돈을 딥테크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GDP를 2040년 세 배 이상인 1조 달러로 늘리고 80퍼센트가 비석유 부문에서 창출될 것이라 합니다. 아부다비에서 개발된 LLM 팰컨은 메타의 라마를 위협할 정도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는 AI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AI의 천지개벽을 보면서 기업들은 이젠 AI 생태계에 뛰어들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기업들은 전문인력 충원에 올인하고, 협력업체 인수와 투자에 나서고 있습니다. 스타트업들 역시 이제 오픈소스가 된 LLM을 기반으로 기업과 개인 등 엔드 유저를 상대로 앱 개발에 나서며 대박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마치 20세기 말 인터넷 붐 시대의 ‘골드러시(gold rush)’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골드러시에 발목을 잡는 빌런이 있습니다. 기후위기입니다.
지난 3월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기업에 대해 기후위기 관련 정보 공시를 의무화하는 ‘기후공시’ 규정을 제정하였습니다. 시가 총액 7,500만 달러 이상의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과 잠재적 자연재해 리스크를 공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후위기가 단순히 환경파괴에 그치지 않고 기업의 영리활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겁니다. 2026년부터 적용될 이 규정에 대해 보수 진영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소송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그리 심각하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일까요?
3월말 브라질 남동부에서는 체감 온도가 62도에 이르는 극심한 폭염이 이어지다가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지난 주 호주 시드니 등 일부 지역에서는 한 달치 강수량이 하루만에 쏟아져 100여편의 항공편이 취소되었습니다. 지금 봄이 한창인 북반구와는 계절이 정반대인 남반구는 기후위기가 현재 진행형인 셈입니다. EU 과학자들은 그린란드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6미터 이상 높아지며 지구 전체가 재앙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하면서 올해가 12만5천년 만에 가장 뜨거울 것이라 합니다. 유엔은 이대로 간다면 2100년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에 비해 최고 2.9도까지 오를 것이라며, 파리기후협약에서 정한 1.5도 목표는 요원해지고 지구열대화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 합니다. 미국 해양대기청에 따르면 안데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로키 산맥 등의 스키장에서 눈이 사라지고 있고, 히말라야에서는 눈 대신 비가 늘어 자연재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기상기구는 2024년 올해를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기후변화는 지구의 속성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올해 8월에 세계지질과학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됩니다. 이 총회에서 지질 과학자들은 인류가 사는 시대를 새로운 용어로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지질 시대가 홀로세(Holocene)에서 인류세(Anthropocene)로 진입한다는 겁니다. 홀로세란 약 1만 2천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 현재까지 지구 평균 기온이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문명이 발달해온 시대입니다. 인류세는 온실가스 급증과 질소 비료로 인한 토양 변화 같은 인류 활동의 영향으로 지구의 물리적·화학적 체계가 바뀐 시대입니다. 지난 200년간의 기계 문명의 결과로서 드디어 인류는 1만 2천년 만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후공시 요구는 미국에 그치지 않습니다. 유럽은 올해 ‘지속가능금융 공시규정’ 개정안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적용에 들어갑니다. 홍콩 증권거래소는 2024년부터 모든 상장사의 기후공시를 의무화했습니다. 한국은 ESG 공시의무를 2026년 이후로 연기하였고, 로드맵은 올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투자자들은 돈을 잃지 않기 위해 기업들의 공시사항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해외에 기업공개를 통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기업들 역시 엄청난 짐을 지게 됩니다. 앞으로 기업들은 IT 보안 세계에서나 통용되던 ‘노 트러스트(No Trust)’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에 부실한 기업들은 믿지 말라는 겁니다.
이처럼 AI와 기후위기가 자본시장을 흔들고 기업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장기적인 지속가능성과 생존을 위해 과학과 기술 변화는 물론이고 정치 지형이 흔들고 있는 사회 변화에 주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AI 생태계 거인들이 주도하는 산업 변화를 따라잡는 데에도 숨이 벅차는 마당에 뒤에서는 기후위기라는 빌런이 턱 밑까지 쫓아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빌런을 제대로 상대해보기도 전에 과거의 빌런에게 먹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AI와 기후위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고 연속선상에 있는 상대입니다. AI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AI와 관련된 기업들은 궁극적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AI 생태계 중 클라우드 컴퓨팅과 하드웨어는 ‘인프라(infrastructure)’라는 한 묶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프라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엔비디아, 델 등 거인들이 주도합니다. 하지만 이들 인프라 기업들은 엄청난 전력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AI 자체로는 전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력은 누가 생산하는가? 풍력이든 태양광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친환경적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그 기반 시설을 만드는 곳은 전형적인 중후장대 기업들인데, 이들 기업들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게 정당할까? 칩을 만드는 엔비디아, 인텔, 삼성전자는 디지털 기업일까 아날로그 기업일까? 삼성전자는 디지털 기업이고, 현대자동차는 아날로그 기업일까? 이런 시비를 거는 것은 AI로 대변되는 디지털과 하드웨어로 대변되는 아날로그를 무우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느냐는 것 때문입니다. 2007년 아이폰 등장 후 애플은 휴대폰 세계를 지배했지만 애플을 AI 거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AI 초기 시대에 꽃피운 디바이스 기업입니다. 유럽의 과학자가 기후위기를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은 위성사진 등 20만 장의 이미지를 AI로 분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플과 유럽 과학자들을 보면 AI와 기후위기 대응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기업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애플과 ASML 등 글로벌 기업이 ESG 경영을 강화하며 전후방 관련 기업이 동참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10% 수준에 불과합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서는 위기입니다. 특히 RE100은 더 큰 부담이 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 대표 기업들이 RE100 달성을 선언했지만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포스코, LG디스플레이 등 뉴욕 증시에 상장한 기업들도 기후위기 공시에 머리를 싸맬 것입니다. 하지만 AI와 기후위기는 동시에 대응해야 할 인식의 전환이라면 달라질 것입니다.
영화 ‘듄: 파트 2’에서 아라키스 행성의 반란군이 우주를 지배하는 황제와 귀족 가문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입니다. 반란군은 우주 에너지원을 만들어내는 척박한 사막 환경에서 살아남으며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전사들입니다. 이들에게 거대한 사막의 벌레도 든든한 응원군입니다. 반면 황제와 귀족 가문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며 규모나 세력 면에서 반란군을 압도합니다. 두 세력 간의 대결은 디지털로 무장한 황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장이 나는 게 순리입니다. 그런데, 최후 일전은 양쪽 전사들이 칼을 들고 육탄전을 벌입니다. 반란군 리더와 황제의 빌런 둘 간의 결투 역시 전형적인 아날로그 식입니다. 빌런은 어떨까요? 기후위기와 AI 둘 다 인간이라는 창조주가 만들어낸 크리처이자 프랑켄슈타인입니다. 그리고 기업인과 기업들만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공포스러운 상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