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장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아직 많이 싸다고 해요.”
홍콩·싱가포르를 자주 오가는 이세철 씨티글로벌마켓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요즘 외국인 투자자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5배 수준으로 미국 반도체 경쟁사인 마이크론(3배)을 크게 밑돈다.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한국 반도체 기업의 저평가 매력을 부각했다. 외국인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올 1분기에만 4조원어치 넘게 쓸어 담은 배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삼성물산 KB금융을 비롯한 PBR 1배를 밑도는 우량주를 선별적으로 사들였다. 1분기 한국 증시에 유입된 외국인 투자금은 15조8000억원에 달했다. 역대 최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거 매입
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1분기 외국인 순매수 종목 1위는 삼성전자였다. 순매수 규모가 5조5020억원에 달했다. 그 뒤를 현대자동차(2조1410억원)와 SK하이닉스(1조7560억원), 삼성전자 우선주(1조540억원), KB금융(6650억원) 등이었다. 삼성전자(우선주 포함)와 SK하이닉스에 쏠린 외국인 투자금만 7조2580억원이었다.글로벌 시장에서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전 세계 투자자들은 관련 수혜주를 집중적으로 담았다. 생성형 AI는 대용량 데이터 학습·추론에 특화된 ‘AI 가속기’로 가동된다. AI 가속기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을 붙여 제조한다. GPU는 엔비디아가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G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엔비디아가 최근 1년 새 220.6% 급등하자 HBM 시장을 과점하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자연스럽게 주목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HBM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만이 생산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두 회사의 점유율이 각각 37~49% 수준으로 추산된다. 올해 두 회사의 실적도 시장 예상보다 큰 폭으로 개선됐다. 삼성전자는 1분기 반도체(DS) 부문에서 1조원대 흑자를 냈을 것으로 추산된다. 2022년 4분기 이후 다섯 분기 만에 흑자 전환이다. 지난해 7조7303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SK하이닉스도 1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가 1조5000억원을 기록해 흑자 전환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적이 뜀박질하면서 목표주가도 줄줄이 상향 조정되고 있다. 씨티글로벌마켓증권을 비롯한 외국계 증권사는 이를 반영해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종전 11만원에서 12만원, SK하이닉스 목표주가를 23만원에서 23만8000원으로 올렸다.
이달에도 1.6조원 순매수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외국인의 한국 반도체 쇼핑을 서두르게 하고 있다. 일본에서 성공한 밸류업 정책은 한국에서도 기대가 높다. 지난 1월 17일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처음 공개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컸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후속 대책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추진될 것이란 신뢰가 생겨났다. 밸류업의 일환으로 배당소득세 등을 손질할 것이라는 발표가 이어지며 기대도 커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19일 배당을 크게 확대하거나 자사주 소각 규모를 늘린 기업을 대상으로 증가분에 한해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배당 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외국인들이 반도체 주식뿐 아니라 밸류업 수혜주로 분류되는 현대차(PBR 0.66배), 삼성물산(0.78배), KB금융(0.48배) 등 저평가 종목을 쓸어 담은 배경이다.2분기에도 외국인 매수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달 들어 외국인은 한국 증시에서 1조5888억원어치 주식을 순매수했다.
김익환/선한결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