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올림픽은 스포츠인들에게 ‘꿈의 무대’다. 셰프들에게도 꿈의 무대가 있다. 124년 역사의 ‘독일 IKA’가 그것이다. 세계조리사회연맹(WACS)이 주최하는 IKA는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 FHA컬리너리챌린지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대회’로 꼽히는 세계적인 행사다. 올림픽처럼 4년마다 열리고 각 종목에서 금·은·동메달을 수여하기 때문에 ‘요리 올림픽’이란 별명이 붙었다.
이런 세계적인 행사에서 올해 젊은 한국인 셰프 두 명이 금·은메달을 따냈다. 주인공은 서울 롯데호텔 피에르가니에르에서 일하는 신지훈 셰프(30)와 배영산 베이커리 파티시에(27). 신 셰프는 컬리너리 아트 부문에서 5코스 메뉴와 핑거푸드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배 파티시에는 페이스트리 아트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땄다.
새우 껍질로 만든 젤리, 딸기로 만들어낸 봄꽃까지. 67개국, 1800여 명을 제치고 메달을 따낸 비결은 신선한 메뉴 콘셉트다. 신 셰프는 버리는 재료들로 완성한 ‘제로 웨이스트’ 메뉴를, 배 파티시에는 한국의 사계절에서 영감을 받은 메뉴를 선보였다.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란 느낌마저 든다. 요리 올림픽에서 선보인 메뉴는 오는 4월 13일까지 서울 롯데호텔, 롯데호텔월드 라세느에서 맛볼 수 있다. 지난 27일 서울 올림픽로 롯데호텔월드에서 그들을 만나 그간의 준비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 앞으로의 꿈을 들었다.
▷IKA 출품작에선 어떤 점에 주력했습니까.
(신) “제가 잡은 콘셉트는 ‘제로 웨이스트’였어요. 주재료를 버리는 부분 하나 없이 모두 사용하는 것이죠. 요리업계에서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중요성이 커지면서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게 추세거든요. 예컨대 새우로 타르타르를 만들 때 남은 껍질을 이용해서 비스큐 스톡을 끓이고 장어는 몸통 외 남은 부분을 다져서 크로켓을 만들었죠. 스톡도 그냥 사용하지 않고 굳혀서 젤리처럼 만들어 타르타르에 색다른 식감을 더했어요.”(배) “한국의 사계절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2년 전 외국에서 다양한 과일을 먹어봤는데 한국의 제철 과일만큼 맛있는 게 없더라고요.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도 없고요. 그래서 봄은 빨간 딸기를 올린 치즈케이크, 여름은 노란 금귤을 사용한 롤케이크, 가을은 갈색빛이 도드라지는 밤 타르트, 겨울은 호두로 만든 브라우니와 차 등을 선보였습니다.
▷메뉴를 고안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신) “메뉴 구상에만 한 달은 걸린 것 같아요. 이후 세 달간은 실제 요리하는 법을 연습했고요. 퇴근 후 혼자 주방에 남아서 만들어보고, 수정하고, 또 만들어보고. 그게 일상이었죠. 사실 제가 대회 2주 전에 결혼했는데 신혼여행도 못 가고 여기에만 매달렸어요. 이해해준 와이프한테 감사하죠. 하하.”(배) “기존에 사계절을 콘셉트로 한 메뉴가 없진 않았지만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모양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점토와 실리콘으로 몰드를 하나하나 만들었죠. 디저트 모양을 잡으려면 몰드가 필요하거든요. 디저트를 잘라보면 안에 치즈케이크가 3단으로 들어가 있는데, 이런 테크닉 면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어요.”
▷듣고 보니 예술 작품에 가까운데요.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신) “책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에요. ‘플레이버 바이블’이라고 요리사들의 교과서 같은 게 있는데 거기에 주재료에 어떤 재료가 어울리는지 두루 나와 있거든요. 그걸 정독하기도 하고 서점에서 잡지를 보며 요즘 외식 트렌드가 어떤지 빨리 체크하기도 하죠. 노포도 자주 가요. 요리로는 호텔보다 한 수 위거든요.”(배) ”외국 유명 셰프들의 강의를 볼 수 있는 모바일 앱이 있는데 그 강의를 보며 여러 스타일을 배워가고 있어요. ‘아, 이 재료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는 걸 많이 느끼죠. 셰프도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는 직업이거든요. ‘젊을 때 공부해놔야지’ 싶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심사평이 있나요.
(신) “심사위원이 제 앞에 서서 ‘너, 이 음식에 자신 있어?’라고 묻더라고요. 손을 덜덜 떨면서 ‘5코스는 자신 있는데 카나페에서 좀 완성도가 떨어진 것 같다’고 답했더니 심사위원이 웃으며 ‘굉장히 잘했다’고 했어요. 그간 힘들었던 걸 보상받은 느낌이었죠.”(배) “사실 제 전공은 베이커리가 아니거든요. 양식을 하다가 베이커리로 넘어왔는데, 심사위원이 먹어본 순간 ‘맛, 밸런스, 모양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어요. 그때 결심했죠. 앞으로 베이커리를 계속해야겠다고.”
▷세계적인 대회인 만큼 다른 참가자들의 작품도 쟁쟁했을 것 같은데요.
(신) “맞아요. IKA는 전시 형태라 음식뿐 아니라 접시부터 테이블을 직접 다 꾸며야 해요. 영국 대표팀을 보니 아예 정원을 만들어놨더라고요. 잔디를 깔고, 새 소리를 틀어놓고, 향수도 뿌리고. 깜짝 놀랐죠. 그걸 제치고 금메달을 딴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요.”(배) “스위스 대표팀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보통 무스와 아이스크림을 같이 쓰지 않는데 그 팀은 동시에 둘을 올려놨는데도 모양이 잘 잡혀 있고 먹음직스럽더라고요. 눈으로만 봐도 ‘아, 이건 무조건 맛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상상도 못 한 조합이라 신기해서 동영상도 찍어놨어요.”
▷어떻게 셰프가 됐나요.
(신) “전 조리고를 나오지도 않았고, 원래 직업군인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에드워드 권 셰프를 봤는데 그분의 눈빛, 카리스마, 리더십에 한눈에 반했죠. 사실 손님이 맛있게 먹는 것도 보람 있지만 제가 새로운 조합을 떠올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플레이팅할 때 너무 행복해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 그게 요리의 매력이거든요.”(배) “저도 비슷해요. 원래 중학생 때까진 태권도 선수였어요. 그러다 엄청난 스타가 되지 않는 이상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걸 찾아봤죠. 그때 웹툰 ‘역전 야매요리’가 눈에 들어왔어요. 밥솥으로 케이크를 만드는 법 등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를 알려주거든요. 그걸 집에서 따라 해보는데 ‘나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죠.”
▷앞으로 어떤 셰프, 어떤 파티시에가 되고 싶나요.
(배) “아직도 선배님들을 보면 제가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그래서 회사에서 따로 스터디 모임을 구성해 퇴근 후에도 연구합니다. 실력을 갈고닦아서 ‘롯데호텔이 베이커리로는 최고지’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신) “나만의 무기를 갖고 싶어요. 결국 사람들은 셰프를 보고 찾아오거든요. 요즘 양산형 레스토랑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내가 굳이 왜 여기를 가야 하지’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은데, 그 질문에 ‘신지훈이니까’라는 답을 주고 싶어요. 음악, 미술처럼 요리사는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한 접시에 담아내야 하거든요.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그걸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음식으로 구현하는 것, 그게 제 목표입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