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파리대왕>이다. 산호섬에 고립되어 야만적인 상태로 되돌아간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파리대왕>은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이며, 그는 이 소설로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골딩은 3부작 <땅끝까지>의 첫 번째 작품 <통과제의>로 부커상도 수상했다.
1967년에 발표한 <피라미드>는 1920년대 영국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을 통해 영국 사회의 계급 ‘피라미드’ 구조를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이다. 다른 작품들이 신화나 우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과 달리 골딩의 자전적 소설로 꼽히는 <피라미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적으로 그렸다. 골딩은 피라미드의 주인공 올리처럼 부모 뜻에 따라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해 자연과학을 공부하다가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이 소설의 배경인 가상의 마을 스틸본 역시 골딩이 유년기를 보낸 말버러를 모델로 구상했다.
골딩은 말버러에서 보낸 유년 시절과 당시 겪은 계급 질서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이 영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되어 이후 골딩의 작품 에 깊숙이 투영되었다. 비판적 문제의식이 가장 뚜렷하고 직접적으로 제시된 <피라미드>를 읽어야 골딩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피라미드는 없다고들 하지만 현대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면서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는 요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티빙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을 보면서 “윌리엄 골딩의 자전적 소설 <피라미드>가 떠오르고, 이문열의 원작 소설과 동명 영화로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오버랩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서로 어울리면서 교묘하게 질시
<피라미드> 속 계급은 어떻게 나뉠까. 술집에 드나들 돈조차 없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하류층, 챈들러스 클로스라는 빈민가,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약사와 의사, 그리고 상류층까지 스틸본 마을은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산다.소설은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계급 간 교류가 단절되거나 드러내놓고 반목하는 방식은 아니다. 서로 어울리면서도 교묘하게 질시하거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형태다. 약사의 아들로 중산층인 올리와 다른 마을에서 흘러 들어온 하층민 떠돌이가 야금야금 상류층을 침범해 큰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가 감동보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삶이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인생은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게도 갸우뚱하게도 만들 듯.
그다지 볼품없는 외모인 18세 올리는 약사의 아들로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이 결정됐다.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상류층 여인 이모젠을 짝사랑했으나 그녀가 결혼한 뒤 상심에 젖는다. 올리는 옆집 의사의 아들인 잘생긴 보비에게 질투를 느낀다. 빈민가 출신 이비와 어울리던 보비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자 올리는 이비와 사귀면서 성취감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철저한 관리하에 양육된 올리는 아버지에게 이비와의 만남을 들키고, 빈민가 여성을 책임감 없이 사귀던 올리가 비겁하게 달아나는 모습에서 스틸본이 피라미드 사회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정받는 계급으로 우월감 느끼다
옥스퍼드 첫 학기를 마치고 돌아와 마을 공연을 첫사랑과 함께 하게 된 올리의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떨까. 올리가 제작자 디트레이시에게 이비와의 일을 털어놓자 디트레이시는 “삶은 무능한 연출가가 연출한 아주 별난 소극과 같아”라고 응답한다. 디트레이시는 이모젠이 ‘머리가 비었고 무감각하며 허영심 많은 여자’임을 알려준다. 올리는 이모젠과 이비에게 더 이상 관심 갖지 않고 자신이 인정받는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낀다.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올리와 상류층 여성 바운스 옆에서 야금야금 성공을 일군 윌리엄스의 이야기가 펄쳐진다.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스틸본 마을에서 계급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비와 바운스의 아픔은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는 어떤 피라미드가 존재하고 있을까. 모든 게 사물로 보이는 올리 같은 사람을 가려내는 눈도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