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운노동조합이 독점적으로 행사해온 인력 채용 추천권을 46년 만에 내려놓기로 했다. 입사를 위해 대출까지 받아 만든 체크카드를 노조 간부에게 상납하는 등 내부에 만연한 채용 비리가 공개된 후 내놓은 쇄신대책이다. 부산항의 인사 청탁과 채용 비리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지 주목되는 가운데 일각에선 이번 쇄신안이 기존 노조의 ‘간부 카르텔’을 깨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본지 2월 13일자 A1, 4면 참조
○항운노조 비리 ‘마침표’ 찍겠다는데…
부산지방해양수산청과 부산항운노조는 22일 부산 중앙동 부산항만공사 대강당에서 ‘항만인력 공급체계 개선을 위한 노사정 협약식’을 열었다. 부산고용노동청과 항만공사, 협회 등 노·사·정 6개 단체가 참여한 행사에서 부산항운노조는 노조원을 직접 상시 고용하는 상용부두의 경우 채용 후보자 추천권을 없애겠다고 밝혔다. 상용부두는 터미널 운영사에 채용돼 인력이 상시 출근하는 부두를 말한다. 부산항운노조는 1978년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터미널인 자성대 부두가 생긴 이후 인사 추천권을 행사해 왔다. 터미널 운영사, 해운사 등이 직접 사람을 뽑지 못하고 노조가 채용과 승진에 권한을 행사하는 기형적 구조가 이어져 왔다.부산항은 노조에 가입해야 회사에 채용되는 클로즈드숍 구조로 운영된다. 지부장과 반장 등 간부 추천이 있어야 직원이 될 수 있고, 승진이 가능한 구조라 그동안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체크카드 상납’을 포함해 비리에 연루된 간부와 이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조합원 등 40여 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번에 노조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권한을 내려놓고, 비리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해양수산부 고위 관계자는 “노조의 인사 추천권은 마지막 남은 제도적 특권”이라며 “먼저 포기한다는 점에서 이번 개혁안에는 기대를 걸어봄 직하다”고 평했다.
부산항운노조 내부에서도 언론의 채용비리 지적 이후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항운노조 관계자는 “신뢰받는 항운노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오는 5월 대의원대회를 거쳐 쇄신안을 실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복된 쇄신안, ‘이번엔 다를까’
쇄신안이 본격화하면 부산항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비상용 조합원을 선발할 때도 노조의 영향력이 줄어들 전망이다. 항운노조 간부가 추천한 인사 대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 노사정심사위원회에서 새 인력을 채용하기로 했다.노조는 비리 직원은 복귀를 막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도 도입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취업 및 승진 관련 비리로 제명된 직원도 5년이 지나면 노조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처벌받은 노조원이 버젓이 간부로 승진하고 활동하는 사례도 많았다.
노조 일각에선 이번 쇄신안도 ‘입개혁’에 그치지 않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항운노조는 간부들이 채용비리 혐의 등으로 대거 구속된 2005년부터 문제가 터질 때마다 개혁을 약속해왔지만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상용지부 지부장 추천권 폐지에도 노조의 영향력은 여전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2019년 12월 노사정 합의에 따라 지금도 부산항인력관리회사(PRS) 소속으로 6개월간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항운노조 소속 임시 조합원만 부산항 상용직 공채에 지원할 수 있다. 그동안 정규채용 전환 과정에서 PRS에도 부산항운노조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본지에 부산항운노조 간부 비리를 제보한 조합원은 “2005년 이후 채용 비리와 처벌이 반복됐고, 각종 쇄신안이 나왔지만 비리가 이어졌다”며 “이번 쇄신안과 별개로 수사 중인 비리 조합원을 엄중히 처벌해야 비리를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희원/김대훈 기자/부산=민건태 기자 to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