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에 봄을 알리는 전령은 벚꽃도, 제비도 아니다. 주주행동주의 서한을 물고 나타나는 ‘늑대’들이다. 미국 식품담배회사 RJR나비스코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스티븐 골드스톤은 ‘기업 사냥꾼’으로 악명 높은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나타나면 ‘봄의 통과의례(a rite of spring)’가 시작됐다고 했다. 주주총회 시즌이면 어김없이 등장해 회사를 상대로 담배와 제과 사업을 분리하라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다.
행동주의펀드를 늑대라고 부르는 건 이들의 시그니처인 ‘이리떼 전략(wolf pack)’에서 기인한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먹잇감이 공격받으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함께 살지만, 자본시장의 이리떼는 한 팀이 아니다. 상대에게 정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모인 느슨한 규합이다. 5% 이상 지분 보유 시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해야 하는 증권법 13조를 피하기 위해선 한 몸으로 보여선 안 된다. 이들은 위장술로 공시 의무를 지지 않고 소송 리스크도 피한다.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가 방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눈치챈 기업이 주주들에게 주식을 싸게 넘기는 ‘포이즌 필’로 지분 매집을 방해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다. 행동주의펀드는 같은 편인 듯 아닌 듯 교란 작전으로 시간을 벌면서 주주를 모은다.
이리떼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 행동주의펀드가 급격히 성장한 배경이다. 작년 행동주의펀드의 운용자산은 4조달러(약 5350조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가가 오르면 재빨리 팔아치운 뒤 다른 기업으로 우르르 몰려가며 자산을 불린다. 한패가 아닌데 뭉친 이들의 목적은 빤하다. 행동주의펀드의 정식 명칭인 ‘액티비스트 헤지펀드(Activist hedge fund)’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본질은 헤지펀드다. 하이리턴(고수익)을 위해 하이리스크(고위험)를 감내하는 단기투자 자본은 행동주의 씨앗이 뿌리내릴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부족하다.
행동주의펀드의 속성을 알면 ‘먹튀’를 일삼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다르다”고 주장하던 토종 행동주의펀드의 행태도 다를 바 없다. 한진 오너가를 비판하던 KCGI는 주가가 오르자 회사 측에 주식을 넘겨 수백억원을 챙겼다. SM엔터에 장기 투자하라던 얼라인파트너스는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치솟자 주식을 전부 팔았다. 괘씸한 건 이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투명성 제고라는 거창한 구호로 주주들을 흔들어 놓고 실질적으로 이들이 바꾼 건 거의 없다. 수많은 기업에서 행동주의펀드가 차익을 실현하고 지나간 뒤의 주가는 썰렁하기만 하다.
행동주의펀드가 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기업 쇄신을 끌어내고 경영 감시와 견제 역할을 하기 위한 움직임은 꼭 필요하다. 홍콩계 행동주의펀드 오아시스매니지먼트가 모바일 게임에 관심 없던 일본 닌텐도를 압박해 히트작 ‘포켓몬고’를 출시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주주총회에서 오아시스처럼 비전과 전략을 담은 주주제안이 나온 사례는 이제껏 보지 못했다. 회사가 어찌 되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세력들은 정부의 밸류업 정책을 등에 업고 하나같이 배당금 확대와 자사주 소각만 외친다. 이사회 교체를 요구하면서 자기 사람을 꽂으려 혈안이다. 미래 사업에 투자하지 말고 사업을 정리하라고 한다. 그러나 행동주의펀드의 공세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밀고 나가 보란 듯 성공한 기업이 더 많다. 드라마 제작에 투자한 넷플릭스와 연구개발에 집중해 보톡스를 개발한 엘러간이 그렇다. 투기자본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행동주의를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 경기 침체기 활발했던 행동주의펀드는 이제 불황, 호황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이어가는데도 기업들은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에서도 삼성물산 금호석유화학 KT&G 등이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행동주의펀드와 표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다. 두둑한 실탄을 확보한 이리떼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행동주의펀드의 대부 아이칸이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natural stupidity)으로 돈을 번다”고 한 말을 기억할 때다. 그가 말하는 인간은 주주일 것이다. 늑대에게 썰매를 끌게 할지, 먹잇감이 될지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