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집단행동으로 인한 의료 공백 사태가 예상 밖으로 길어지자 정부가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다. 정부는 1285억원 규모 예비비를 확보해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채울 대체인력을 채용하고 병원에 남은 의료진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간 의료 현장을 지켜온 교수와 전임의 일부까지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어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는 계속될 전망이다.
○집단행동 2주 만에 예비비 투입
윤석열 대통령은 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했다. 미복귀 전공의들을 향해선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 방기” 등 날 선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중대본 회의를 주재한 것은 지난해 7월 집중호우 이후 약 8개월 만이다. 그만큼 현 사태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윤 대통령은 이번 의료 파행 사태를 계기로 의대 증원뿐 아니라 그간 누적된 의료계 문제도 함께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위기에 처한 의료현장을 조속히 정상화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의 실행 속도를 더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날 회의 후 응급·고난도 수술의 수가 인상,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등 당근책을 제시했다. 또 산모, 신생아 중증질환 등 필수진료 분야에 1200억원 규모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병원 복귀를 거부하는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등 법적 대응을 이어가면서 의료계가 요구하는 필수의료 강화 대책의 구체적 안을 차례로 발표할 계획이다.
중대본 회의에 앞서 정부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비상진료대책을 시행하기 위한 1285억원 규모의 예비비 지출안을 의결했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본격화한 지난달 20일 이후 2주 만이다.
정부는 예비비의 상당액을 핵심 의료인력 확충에 쓴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응급·중증 진료를 담당하는 상급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580억원에 달하는 인건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198억원은 전공의들이 이탈한 자리를 채워줄 신규 인력 채용에 배정했다. 민간 병·의원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봉직의(페이닥터)나 종합병원 근무 경력이 있는 간호사가 집중 채용 대상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예산을 통해 최소 900명 이상의 의료진을 새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사태가 장기화하면 추가 예비비 편성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악 상황 상정한 비상계획 수립
정부가 대체인력 확보에 나섰지만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우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4일 오후 8시 기준 상위 100개 수련병원 전공의 9970명 가운데 90%인 8983명이 의료 현장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이번 예비비 편성으로 확보를 추진 중인 900명가량의 의료 인력과 170명의 공보의·군의관을 합쳐도 빠져나간 인력의 8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서울대병원 관계자도 “쉬고 있는 의사가 많지 않은 데다 병원이 채용 공고를 내고 채용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며 “한 달 이내에 인력 충원의 효과를 보긴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관가에 따르면 정부는 교수와 전임의 이탈로 주요 대형 종합병원의 기능이 마비되는 수준의 최악 상황까지도 염두에 둔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처음부터 장기화에 대비해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황정환/박상용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