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떨 땐 2배속도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콘텐츠의 기승전결을 다 보기에는 참을성이 없어요."
20대 직장인 김모 씨는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늘 유튜브를 시청한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오른손 엄지는 항상 화면 우측을 꾹 누르고 있다. 영상을 2배속으로 보기 위함이다. 김 씨는 "집에 가서 할 일도 많은데 볼 것도 많으니까 늘 2배속으로 보거나 10초씩 넘겨 본다"며 "그렇게 봐도 친구들과 관련 내용으로 대화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30대 직장인 이모 씨의 주말 취미는 '영화·드라마 요약 영상 시청'이다. 그는 "주말마다 몇시간씩 되는 드라마나 영화를 계속 보기엔 시간이 아깝다"면서 "OTT 서비스도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잘 안 들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요즘엔 결말까지 포함된 영상이 많아 줄거리를 파악하기 좋다"며 "요약 영상을 보면 방대한 분량을 빠르게 섭렵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부연했다.
바쁜 현대인이 분초(分秒)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사용하는 세태를 '분초 사회'라고 부르더니, 이젠 본격적으로 '시(時)성비(시간 대비 성능)'를 따지는 분위기다. 각종 요약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요약 콘텐츠가 가장 먼저 주목받았던 곳은 유튜브다. 영화나 드라마를 20~30분 안팎으로 압축한 '패스트 무비'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다. 16부작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30분으로 요약한 영상으로 1869만 조회수를 찍은 채널 '고몽'은 237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고몽의 요약 영상은 공중파에도 진출했다. KBS는 지난달 11일 설 연휴를 맞아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본방송을 결방하고, 고몽의 고려거란전쟁 요약본을 송출한 바 있다.
2017년부터 영화와 드라마 요약본을 업로드하고 있는 채널 '지무비'의 구독자는 무려 333만명이다. 지난해 12월 지무비 채널 운영자 나현갑 씨는 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유튜브 한 달 수익으로 직장인 연봉의 3~4배를 번다고 공개한 바 있다. 모두 요약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 것을 방증한다.
애당초 요약 콘텐츠가 아니라면, 아예 파격적으로 짧은 영상이 인기다.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으로 잘 알려진 채널 '충주시'는 길어야 5분, 짧으면 10초 미만의 영상을 매주 한 편꼴로 올린다. 짧으면서도 핵심을 간파하는 영상에 구독자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공개하는 영상마다 수십, 수백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지자체 유튜브 채널 가운데 구독자 수도 1위다.
요약 콘텐츠는 비단 영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릴리스에이아이(AI)는 유튜브 영상의 링크를 입력하면 이를 노트 형식의 글로 요약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 62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몰이 중인 영화 '파묘'의 11분짜리 압축 영상을 릴리스AI로 요약해보니, 서비스가 알아서 영상을 주제별로 나누고 글로 정리해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출신의 유현수 릴리스AI 대표는 한경닷컴과의 통화에서 "요약 영상의 매력은 원작 영화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데다, 시간 효율은 훨씬 뛰어나다는 점"이라며 "서비스 출시 5개월 만에 누적 서비스 이용자 수는 9만5000명을 넘어섰으며 서비스 재방문율은 57%"라고 말했다.
이미 다양한 정보를 글로 가공해둔 책도 다시 줄여서 공급한다. 밀리의 서재가 제공하는 '챗북'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원작 도서를 15~20분 분량으로 각색하고 말풍선 형태로 가공해 전달한다. 밀리의 서재 관계자는 "챗북만 봐도 책의 전반적인 맥락이 전달되게끔 전문 작가를 고용해 각색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신규 콘텐츠 개발 계획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한발 앞서 시성비 콘텐츠가 유행했다. 현지에서 '타이파(Time Performance)'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고, 조리가 필요 없는 영양식이 인기다. 실용서 한 권을 10분 분량으로 요약해서 읽어주는 애플리케이션 '플라이어(Flier)'의 회원 수도 2019년 50만명에서 지난해 110만명으로 성장했다.
일각에서는 요약 콘텐츠로 자극성만을 좇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매일 방대한 양의 콘텐츠가 쏟아지다 보니 이를 향유하는 이들이 시간 압박을 느껴 생긴 결과"라며 "다만 요약은 콘텐츠의 본질과 맥락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요약 콘텐츠를 즐기다 보면 생소한 내용은 배제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만 계속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이 강화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길러지지 않아 콘텐츠 산업의 질적 도약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