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만 해도 한국은 세계 원전 시장의 ‘신흥 강자’로 통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미국과 프랑스, 중국을 제치고 23조원짜리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을 수주한 데 이어 2012년에는 세계 최초로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에 성공해서다.
거기까지였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산업 자체가 붕괴 위기에 내몰렸는데, SMR만 살아날 순 없었다. 그렇게 한때 한국이 가장 앞섰던 SMR은 10년 넘게 제자리만 맴돌았다. 그 틈을 후발 주자들이 치고 들어왔다. 미국은 SMR 벤처에 대한 조(兆) 단위 지원과 과감한 규제 개혁으로 2030년 SMR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정책 폐기’와 함께 SMR 규제 완화에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 원전 게임체인저 판 키운다
SMR은 미래 에너지산업의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 불린다. 안전한 데다 건설비도 10분의 1밖에 안 돼서다. 작은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형태라 전기를 많이 쓰는 산업단지나 데이터센터 옆에 지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하지만 한국에서 SMR을 짓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형 원전에 적용하는 규제를 SMR을 지을 때도 다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반경 20~30㎞ 내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동의를 구해야 하고, 대피소와 대피로도 마련해야 한다’는 방사선비상계획구역 규정이 대표적이다. 환경영향평가도 통과해야 한다. 설치 후엔 군·경·소방관청은 물론 원자력안전전문기관, 방사선의료전문기관 등과 함께 ‘국가방사능방재연합훈련’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여기에 드는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SMR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사업비가 10조원에 달하는 대형 원전과 달리 SMR은 이런 부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파악해 2020년부터 대형 원전과 SMR 규제를 분리했다. 원전의 전기 출력량과 사고 가능성, 자체 냉각 여부 등을 감안해 규제를 차등화한 것. 그렇게 하루 6만 가구의 전기(77㎿)를 생산할 수 있는 뉴스케일파워 SMR의 비상계획구역은 반경 230m로 정했다. 업계에선 한국의 방사선비상계획구역도 미국과 같이 200~300m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원전 사고 10억 년에 한 번
정부가 차등 규제로 방향을 잡은 배경에는 SMR의 높은 안전성이 자리잡고 있다. SMR은 발열량이 많지 않은 데다 별도의 전원 없이도 원전 내부를 냉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 중대 사고율도 낮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대형 원전의 노심(원전 중심부) 손상 발생 확률이 ‘10만 년에 한 번’이라면 SMR은 이보다 1만 배 안전한 ‘10억 년에 한 번’ 수준으로 설계한다”고 말했다.기술도 진화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2008년 설립한 테라파워는 사고 위험을 낮추기 위해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4세대 SMR’이다. 원전 사고 시 오염수가 필연적으로 나오는 경수로와 달리 공기와 만나면 굳는 소듐 냉각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이 퍼지지 않는다. 핵연료 교체 주기도 최대 20년으로 대형 원전(18개월)보다 훨씬 길다. 폐기물이 그만큼 적게 나온다는 뜻이다.
정부는 내년 말까지 세부 규제를 마련한 뒤 ‘한국형 SMR’ 개발을 위한 표준설계 인가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2028년 표준설계 인가를 받으면 실증 작업과 설치 공사를 거쳐 2035년께 첫 가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무리 서둘러도 미국보다 5년 늦는 셈”이라고 말했다.
변수는 SMR 규제 완화 및 설치 과정에서 부딪힐 수 있는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는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특성의 SMR에 대한 규제 기준이 필요해 규제연구추진단을 출범하게 된 것”이라며 “SMR 설계와 안정성 등을 철저히 검토해 그에 맞는 규제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