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나 환경을 침해한 기업에 책임을 묻는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법’이 의회 표결을 앞두고 좌초했다. 중국 신장 지역에 사업장을 둔 기업이 있는 독일 등 대국이 막판에 입장을 틀면서다. 중국과의 관계를 둘러싼 EU 국가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다시금 노출됐다는 평가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기업의 지속가능한 공급망 실사 지침’(CSDDD)은 28일(현지시간) 열린 EU 상주 대표 회의에서 최종 채택되지 못했다. 이 지침이 통과되려면 EU 전체 인구의 65%를 대표하는 15개 회원국, 즉 전체 27개 회원국 중 과반수가 찬성해야 하는데, 13개국이 기권하고 1개국이 반대한 것이다.
EU 순회 의장국인 벨기에는 성명에서 “(CSDDD가)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며 “유럽의회와 협의해 회원국들의 우려를 해소할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겠다”고 알렸다. 2주 내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CSDDD는 오는 6월 6~9일 EU 의회 선거 이후까지 처리가 보류돼 도입 여부 자체가 불확실해진다. ㅎ유럽의회의 별도 승인까지 거쳐야 하는데 현 의회의 회기가 곧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2027년 발효를 목표로 하는 CSDDD는 공급망 단계에서 강제노동 또는 아동노동을 동원하거나 환경을 훼손한 대기업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한 법이다. 생산 공정 전반에 걸쳐 인권·환경 관련 실사를 의무화하고, 관련 규정을 위반한 것이 확인되면 연 매출액의 최대 5%까지 벌금을 부과한다. 직원 수가 500명 이상이고 전 세계 매출액이 1억5000만유로(약 2169억원)를 넘는 기업이 대상이다.
작년 말 EU 이사회와 집행위원회, 유럽의회 간 3자 협상이 타결되면서 최종 타협안이 마련됐지만, 내부 분열이 불거졌다. 이날 기권국 중엔 독일과 이탈리아가 포함돼 있다. 독일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친(親)기업 성향 자유민주당(FDP)을 주축으로 반대파가 집결했다.
독일은 CSDDD가 도입되면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국가로 꼽힌다. 화학기업 BASF, 자동차 제조업체 폭스바겐 등이 중국 신장위구르 자치 지역에 공장을 두고 있어서다. 신장은 중국 정부가 위구르인 등 소수 민족을 대규모로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지역이다. 미국은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마련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 등은 최근 보고서에서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이곳에서 생산된 알루미늄을 여전히 사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도 직간접적 압박을 가했다. 중국상공회의소는 2022년 EU에 제출한 서면 자료에서 “대상 기업은 공급망 전체에 걸쳐 자신의 역량과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수준의 실사를 수행해야 한다”며 “과도한 행정 부담과 불균형적 책임이 지워질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엇보다 독일은 이미 자체 공급망 실사법을 만들어 지난해부터 시행해 왔다는 점에서 이중 규제 우려가 제기됐다. 독일은 직원 수가 1000명 이상인 기업(첫해에는 3000명 이상)이 인권·환경 규정을 위반할 경우 최대 80만유로(약 11억6000만원·연매출이 4억유로를 초과할 경우 연매출의 최대 2%)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독일 로비 단체들은 이 법으로 인해 중소기업들의 부품 조달이 어려워졌다고 비판해 왔다. EU 차원의 지침까지 도입되면 독일 기업들이 경쟁력을 완전히 잃을 거란 우려다. 글로벌 공급망이 워낙 복잡해 부품이나 원자재 하나하나의 출처를 규명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코발트 등 광물이 EU의 인권·환경 기준을 준수하지 않는 콩고민주공화국 등에서 공급되고 있어 내연차 대체 과정에서도 불가피한 규정 위반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마르코 부쉬만 독일 법무장관은 이날 X(옛 트위터)에 “현 타협안에 반대할 만한 실질적인 이유가 너무 많았다”며 “관료주의와 기업들의 위험 부담이 과도해지는 데다 실질적으로 관리 불가능한 실사 요구 사항이 너무 많은 반면, 눈에 보이는 이익은 너무 적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기권은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이탈리아, 불가리아 등이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기업 로비 단체인 컨피더스트리아(Confidustria)는 정부에 서한을 보내 “CSDDD의 적용 범위가 너무 넓어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반대표를 던진 스웨덴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은 이미 예전부터 CSDDD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법 적용 기준을 직원 수가 5000명 이상인 기업으로 좁히는 등의 방식으로 지침을 개정해 막판 조율을 시도했다고 한다.
인권 단체들은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136개 캠페인 그룹은 공동 성명을 내고 “독일 FDP가 꾸미고 프랑스에 의해 뒷받침된, 개탄스러운 후퇴”라고 지적했다. 비영리 환경단체 세계벤치마킹연합의 리차드 가디너 EU 정책 책임자는 “내가 목격한 지난 15년간의 EU 법률 제정 과정 중 가장 지저분하고 실망스러웠다”며 “EU 경제를 녹색화하겠다는 단순한 목표는 국가 이기주의가 노출되는 결과만 낳았다”고 했다. 비영리기구 글로벌위트니스의 베아테 벨러 기업 책임 운동가 역시 “인권과 환경 문제에 있어 중대한 차질”이라며 “EU는 지구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한 세대에 한 번뿐인 기회를 좌절시켰다”고 말했다.
일부 유럽의회 의원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CSDDD 초안을 마련한 라라 울터스 네덜란드 의원은 “유럽의회에서 벌어진 정치 게임에 분노한다. 이는 유럽의회에 대한 명백한 무시”라며 “시간이 촉박하다. 회원국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이디 하우탈라 핀란드 의원도 “독일 FDP가 사보타주(고의적 방해 행위)에 성공해 많은 회원국을 끌어들였다”고 지적하면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선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