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협상을 이어가겠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50인 미만 사업장에 확대 적용된 지 이틀 만인 1월 29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이같이 약속했다.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줄폐업이 예상돼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더불어민주당도 협상을 지속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이 사안을 조율해야 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한 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28일 전체회의를 마지막으로 16명의 환노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상임위 활동을 아예 내려놨다. 경제계 관계자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는데 소관 상임위 의원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법안 심의 손 놓은 의원들
쟁점이 있는 법안을 여야 의원들이 오랜 기간 심의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국회 논의는 사회적 합의를 위한 최종 단계인 만큼 비판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21대 국회 막바지 들어 중요한 법안 상당수가 의원들의 무관심과 태만으로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신설을 위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은 지난해 11월 국회에 제출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두 차례 올라갔다. 하지만 해당 법안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논의는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첫 번째 소위는 정족수 미달로 개최 자체가 연기돼 논의할 시간이 부족했다. 두 번째 소위 때도 석탄발전소 폐기를 놓고 민주당 의원들과 정부 관계자들 간 갈등이 빚어져 논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고준위 방폐장법에 대해 “부수적인 부분만 손보면 야당 입장에서 크게 반대할 법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상임위 단계의 태만이 목구멍까지 찬 고준위 방폐장을 신설하는 일을 늦추고 있다는 지적이다.
비대면 진료 제도화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 역시 마찬가지다.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지난해 8월 논의된 이후 상정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복지위 관계자도 “여야 간 입장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의사 및 약사 출신 일부 의원이 법안 상정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며 “직역 단체를 대표한 소수 의원에게 막혀 법안 논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마음은 총선에
증권시장부터 암호화폐까지 금융 관련 입법을 총괄하는 정무위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법안 심의가 ‘올스톱’ 상태다. 공매도 제도 개선(자본시장법 개정안), 주식시장 불공정거래 처벌 강화(자본시장법 개정안),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도입(자본시장법 개정안), 토큰증권 도입(전자증권법 개정안) 등 금융업계의 굵직한 현안들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원인은 엉뚱하게도 민주유공자법(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개정안이다. 민주당이 “21대 국회 내에 마무리 짓겠다”며 작년 12월 14일 소위에서 강행 처리하자 이에 반발한 국민의힘이 소위 일정을 보이콧하고 있다.
총선이 다가오며 이 같은 국회의 ‘태업’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어렵게 소위를 열고 법안을 심의한 상임위도 조마조마하긴 마찬가지다. 국산 무기 수출을 지원하기 위한 수출입은행법 개정안은 지난 23일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지 못할 뻔했다. 전체 의원 26명 중 13명이 불참해 과반인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를 주장해온 여당 소속 의원 10명 중 7명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결국 김상훈 기재위원장이 회의를 2시간가량 정회한 뒤 겨우 의결정족수를 채워 통과시켰다.
국회 관계자는 “4월 총선 당선이 중요한 의원들이 너나없이 회의 일정을 미뤄 상임위 활동이 공전하고 있다”며 “21대 국회에서 유독 심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노경목/배성수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