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돌 뮤직비디오는 영화급이네요. 너무나 고퀄리티!"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의 컴백 트레일러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해당 영상에서 멤버들은 낙원상가를 비롯해 어두운 골목, 칙칙한 지하실 등에서 당당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다소 거친 영상의 질감, 지극히 현실적이고 투박한 배경은 한국어·영어·일본어가 섞인 내레이션, 힙한 멤버들의 패션 및 당찬 태도와 만나니 세련되다 못해 멋들어졌다. 잘 짜인 광고를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영상은 후반부에 들어 부가적인 스토리가 입혀지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CF계 스타 감독 유광굉의 작품이다. 센스 있는 스토리 라인과 신선한 장면 전환, 다채로운 영상미로 광고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공유 카누, 전지현 마켓컬리, 블랙핑크 제니 뷰티컬리·탬버린즈, 틸다 스윈튼이 출연한 설화수 광고 등 놀라운 이력을 자랑한다.
유 감독은 과거 김동률, 이터널 모닝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적이 있지만 아이돌 음악과 본격적으로 손을 잡은 건 최근 들어서다. 르세라핌에 앞서 아이브 '이더 웨이(Either Way)' 뮤직비디오, 엔하이픈 미니 4집 '다크 블러드(DARK BLOOD)', 미니 5집 '오렌지 블러드'(ORANGE BLOOD)'를 작업했다.
광고계에서 '핫'한 또 다른 감독인 신우석은 뉴진스(NewJeans)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신 감독은 앞서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랑사가, SSG닷컴, 테라 등의 광고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특유의 재치 있는 연출로 MZ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그는 뉴진스 '디토(Ditto)', 'OMG', 'ETA' 등을 작업해 호평받았다. 'OMG'는 뉴진스의 첫 2억뷰 뮤직비디오가 됐다.
아이유는 영화감독과 손을 잡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한국형 재난물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은 엄태화 감독이 신곡 '러브 윈즈 올(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를 위해 메가폰을 잡았다. 아이유, 방탄소년단(BTS) 뷔가 출연해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피해 폐허를 누비는 설정이 영화처럼 그려지는 가운데 곡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충실하게 반영해 노래가 더욱 돋보인다. 영상은 공개된 지 2주 만에 조회수 4000만회를 훌쩍 넘겼다.
K팝 뮤직비디오의 중요성이 커졌다. 팀 고유의 콘셉트, 음악 장르를 표현해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확장하며 이제 더 이상 부가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곡 주제에 따라 사랑, 이별, 우정 등의 이야기를 단편적인 드라마타이즈 형식으로 펼쳐내던 구성에서 벗어나 보다 개성 있고 입체적인 영상물로 자리 잡고 있다.
유튜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파급력이 거세진 데다 팀의 정체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뮤비 영상의 힘'은 더욱 대두됐다. 대형 기획사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긴 하나 각 엔터사는 뮤직비디오 제작에 수십억대의 제작비를 투입하는가 하면 퍼포먼스 영상까지도 높은 퀄리티로 만들어내고 있다. 컴백 때마다 한 개의 뮤직비디오를 내던 공식도 깨져 이제는 2~4개를 제작하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업계 관계자들은 음원 이용량은 감소하는 반면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 이용량은 꾸준히 증가해 '보는 음악'이 대세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K팝 팬들이 아이브의 나르시시즘, 르세라핌의 주체성 등 팀이 지닌 색깔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지나 방향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데에는 비주얼적인 요소도 큰 역할을 하는데 뮤직비디오는 좋은 수단"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타 분야 감독과의 협업도 다양해졌고, 팬들도 좋은 반응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K팝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대로 광고 업계에서도 K팝 아티스트들을 환영하고 있다.
유광굉 감독은 방탄소년단 뷔와 컴포즈 커피 광고 작업을 함께 해 화제가 됐다. 광고 영상 조회수는 공개 하루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돌파한 데 이어 누적 1000만회까지 넘어섰다. 브랜드 공식 SNS 채널 팔로어 유입도 급증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광고 업로드와 함께 팔로워가 전일 대비 53% 급증, 약 3만명 이상이 신규 유입됐으며, 광고 공개와 함께 새롭게 오픈한 엑스(X·옛 트위터) 계정은 현재 팔로워 7000명을 넘어섰다.
컴포즈 커피는 대표적인 저가 커피 브랜드인데, 둘의 협업이 기존 이미지를 상쇄하는 효과까지 내고 있다. 감각적으로 풀어낸 영상미에 네티즌들은 "컴포즈 커피에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생겼다"는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명 감독들과 K팝의 만남이 각 분야서 윈윈(win-win) 효과를 내고 있다"면서 "광고 쪽에서는 아이돌의 젊고 건강한 분위기가 브랜드 이미지 구축 및 개선에 도움을 주고, K팝 시장은 최근 자극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이면서도 트렌디하고 힙한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하고 있어 광고·영화계가 선호해오던 무드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전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