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을 주저앉히는 방법은 간단하다. “호모 사피엔스 역사 이래 최고의 재능” 같은 찬사를 안겨주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대부분 다음 작품에서 망한다. 최악의 경우 데뷔작이 대표작이자 은퇴작이 되기도 하는데 대중음악에서는 이런 경우를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라고 부른다. 악취미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중견 이상부터는 쉽지 않다. 칭찬도 제법 받아본 터라 매체에서 하는 소리도 가려들을 줄 알고 나름 깜냥 계산도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확실하게 통하는 필살기가 있으니 ‘거장’ 타이틀을 달아주는 거다. 증세는 심각하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뭐든 거장답게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 끝에 닭 잡을 때 소 칼을 쓰고 가벼운 패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강슛을 날린다.
얼마 전 개봉한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을 보며 든 생각이다. ‘나폴레옹’은 러닝타임이 무려 158분인 방광 압박 영화다. 시작하고 한 시간 동안 끔찍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다루고 있는데 아는 사람에게는 아는 얘기라 지루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몰라서 수면제다. 집에 갈까 생각할 무렵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나왔다.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러시아 황제가 한판 붙어 ‘3제 회전(三帝會戰)’이라 불리는데 한겨울, 날아든 포탄이 호수의 얼음을 깨면서 말과 사람이 무더기로 빠져서 들어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속으로 소리쳤다. “이거라고요, 감독님.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것은 인간 나폴레옹에 대한 ‘거장다운 성찰’이 아니다. ‘전쟁의 신’ 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니 그가 펼치는 화려하고 장엄한 전투 장면을 큰 화면으로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앞부분 왕창 들어내고 100분짜리로 개봉했으면 관객 수가 뒤에 0이 하나 더 붙지 않았을까 싶다.
거장의 특징은 의외로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프랑스 혁명을 질리게 보여 준 것은 장중한 역사의 흐름을 ‘거장’다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자기과시 열망의 산물이다. 그게 아니라면 첫 장면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일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정보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원래 이름이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인 그는 프랑스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 혈통의 코르시카 사람이며 프랑스 혁명 때는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물을 먹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
영화는 압축의 예술이다. 이거 설명하는데 1분이면 된다. 영화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옆자리 관객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왜 러시아에 쳐들어간 거야?” 이 질문이 나올 정도면 관객에 대한 배려 1도 없다는 얘기다(유럽인들은 자기네 역사니까 혹시 알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 국력의 척도임을 알고 있던 사람이다. 특히 영국과 인도의 무역 루트를 막아 영국의 인도 지배를 약화시키고 대신 프랑스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게 장기적인 목표였다. 그래서 영국 해군과 야심차게 맞붙은 게 이집트 아부키르만에서 벌어진 나일 전투다. 결과는 스코어를 기록하기도 민망한 프랑스 해군의 완벽한 패배. 복수혈전으로 더욱 야심차게 준비한 트라팔가르 해전 역시 프랑스의 참패였다.
혈압이 오른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로 영국을 압박했고 영국 또한 맞불을 놓아 쌍방 봉쇄 상황이 된다. 문제는 굳이 유럽 국가들이 아니더라도 물건을 내다 팔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는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경제 실력은 그에 한참 못 미쳤다는 사실이다. 무역이 금지되면서 영국에 목재와 곡물을 수출하던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은 발을 동동 구른다. 네덜란드와 에스파냐도 입이 나온다. 영국과 거래를 못 하게 막았으니 프랑스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나폴레옹이 가진 것은 군사력밖에 없었다. 바로 직전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헐값에 넘겨 더 팔 것도 없었다.
대륙봉쇄령은 영국이 아니라 영국과의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을 고달프게 만들었고 각국 무역상들은 밀무역을 시작한다. 그중 가장 결사적이고 노골적이었던 게 러시아였고 그래서 손 봐주러 떠난 게 러시아 원정이었으나 그 실패로 나폴레옹 제국은 몰락하게 된다.
15세기 이탈리아 용병대장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첫 번째로 돈, 두 번째로 더 많은 돈, 세 번째로 더욱더 많은 돈.” 나폴레옹이 마음에 새겼어야 할 구절이다. 리들리 스콧은 5년 간격으로 대박을 터트리는 재미있는 흥행 사이클을 가진 인물이다. ‘글래디에이터(2000년)’, ‘킹덤 오브 헤븐(2005년)’, ‘로빈 후드(2010년)’, ‘마션(2015년)’으로 흥행일지를 써왔는데 대략 시점이 맞아떨어져 기대했던 게 ‘나폴레옹’이었다.
전혀 안 ‘거장’다워도 좋으니 다음에는 힘 빼고 편하게 영화 만드시면 좋겠다. 나폴레옹이 특정 체위에 집착했다는 거 말고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은 영화를 보는 것은 감독에게도 관객에게도 슬픈 일이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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