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계를 이끌어가는 민관의 양대기구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간의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유인촌 문체부 장관의 사과를 요구하며 사실상 '문체부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다. 이 회장은 "문체부 장관이 사과하고 재발을 방지하고, 담당자 문책의 필요하다"며 "시작을 했기 때문에 끝을 봐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장관 사과" 요구 이후 "간담회 보이콧"
이 회장은 지난 6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8차 이사회에서 강도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장재근 국가대표 진천 선수촌장이 4번이나 문서를 보냈는데도 문체부에서 올해 체육 예산을 아직도 주지 않고 있다"면서 "이게 문체부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이사회에서 대한체육회는 업무 협의 등 문체부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공문서화 하기로 했다. 문서화가 어려울 경우 이메일로 협의하고, 유선으로 업무 협의 시 사전 동의하에 녹음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각 사안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업무 추진의 투명성 제고하겠다는 이유에서다. 전국 시·도체육회장협의회도 이 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협의회는 7일 유 장관이 초청하는 간담회에 불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간담회는 설 연휴 직후인 오는 14일 유 장관이 17개 시·도체육회장과 전국 시·군·구체육협의회 회장을 포함해 18명을 초청하는 자리다. 협의회는 이 간담회에 대해 "체육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상급 기관의 전시 행정의 표본"이라며 "대한체육회 정기 대의원총회 하루 전날인 14일에 문체부가 논의할 의제도 없는 장관 간담회를 마련한 것은 시·도체육회를 통해 대한체육회를 견제하겠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1만5000명 운집해 실력행사
대한체육회와 문체부간 갈등은 오랜기간 이어져온 사안이다. 대한체육회는 문체부를 통해 연간 4000억원 가량의 예산을 받아 운영한다. 대한체육회에서는 문체부가 예산을 이유로 체육계의 자율성을 흔든다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드러내왔다. 갈등이 전면적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다. 스포츠 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민관합동기구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가 출범했지만 대한체육회가 이를 보이콧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본격 비화되기 시작했다. 체육회가 추천한 9명의 민간위원 후보 가운데 한명도 위촉되지 않은점을 들어 "문체부가 체육계 의견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응해 독립적인 행정기관 국가스포츠위원회 설립을 추진하겠다고도 밝혔다.
여기에 스위스 로잔 국외 연락사무소 승인 지연, 정관 개정 승인 지연 등에 대한 불만도 연달아 터져나왔다. 체육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OC) 본부가 있는 로잔에 사무소 개설을 추진했지만 문체부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또 체육회가 정관에 체육단체 임원의 결격 사유로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의원’ 조항에 정치적 중립성 강화를 명분으로 ‘해당 직이 아니게 된 날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아니한 사람을 포함한다’는 단서를 추가한 것도 문체부의 협조를 얻지 못했다. 문체부가 승인하면 당장 올해 말부터 시작될 차기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정치권 출신 인사의 출마가 제한된다.
체육회의 공격에 유 장관이 정면으로 반박에 나섰다. 유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대한올림픽위원회(KSOC)를 대한체육회에서 분리할 필요성을 직접 언급했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대한체육회의 국내외 위상에 핵심적인 조직이라는 점에서 유 장관이 이 회장과의 정면대결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결국 문체부가 뒤늦게 로잔 사무소 개설을 승인하며 봉합에 나섰지만 체육회는 한층 더 강경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16일에는 서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1만5000여명이 참가한 체육인대회를 열었다.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 성공 개최와 2024 파리올림픽 선전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행사라는 대한체육회 측의 설명과 달리, 현장에는 "KOC 분리 결사반대" "문체부 장관 사과" 등의 문구가 걸렸다.
"3선 노리는 이 회장 체급 높이기" 분석
이 회장이 주도하는 체육회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체육계 안팎에서는 이 회장의 '개인기'라는 평가가 많다. 이 회장은 한국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행정가다. 1989년 우성산업개발을 창업한 이 회장은 이후 대한카누연맹 회장,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거쳐 2016년부터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내고 있다. 매 정권마다 체육 관련 이슈에서 각을 세우며 주장을 관철시켜오는 마당발로 유명하다. 최근 갈등국면에서는 문체부를 향해 "관료 카르텔"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용산과도 교감중"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재선 회장인 그는 내년 1월 열리는 회장 선거에서 3연임에 도전할 것으로 체육계 안팎에서는 보고 있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3선 연임을 노리는 이회장 입장에서는 유 장관과 정면대결 국면이 본인의 몸집을 키우고 내부를 결집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전략일 것"이라거 분석했다.
오는 4월 열리는 총선도 대한체육회 측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호재다. 대한체육회는 산하에 전국 시군구 체육회를 거느리고 있다. 지역의 풀뿌리 체육조직을 장악하고 있기에 정치권이 체육회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 회장이 주도하는 체육계 갈등은 쉽사리 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회장은 한번 더 실력 행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사회에서 "상황이 정리되지 않으면 오는 15일 대의원 총회에서 의견을 수렴한 뒤 3월 15일 까지 전국을 순회할 것이다. 국가스포츠위원회 설립, 문체부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교육하고 3월20일 국회 잔디광장에 5만명이 모일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에서 이슈화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그는 "4월 총선 253개 선거구 여야 후보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팀도 다 구성됐다. 여야 공천자가 확정되면 2월말부터 양당 후보에게 서명을 받을 것이다.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다 도장을 받고 법률 개정 작업 시작할 것"이라며 정치적 압박 의사를 분명히 했다.
문체부 측은 이 회장의 발언과 체육회의 행보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문체부 관계자는 "문체부가 대한체육회에 배정된 예산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며 "진천 선수촌 예산 비롯해 전체 예산의 30% 정도가 이미 집행이 된 상태고, 나머지 사업계획이 미비한 부분에 대해선 통상적인 검토를 거치는 중이라 집행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스포츠위원회 별도 구성안에 대해서는 "대한체육회와 문체부의 협의로 결정되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국민적 공론과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오는 7월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체육계의 갈등이 확대되는데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체육계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민관이 힘을 합쳐 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인데 주무부처와 대표단체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조수영/신연수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