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 정책과 농산물 수입 계획 등에 반발하는 농민 시위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와 각국 정부가 현장과 동떨어진 친환경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벨기에 일반농업인연합(ABS) 소속 농민들이 교역 허브인 벨기에 서북부 제브뤼헤항에 트랙터를 몰고 와 진입로를 막아섰다. 이들은 EU의 환경규제 완화를 요구하며 최소 36시간 이상 농성하겠다고 예고했다.
독일 최대 항만인 함부르크항과 주변 시내에도 이날 농민들이 전국에서 몰고 온 수백 대의 트랙터가 교통을 방해했다. 니더작센주의 컨테이너항인 야데베저항과 북부 브레멘주 브레머하펜항 등 전국에서 트랙터 시위가 벌어졌다. 프랑스 농민들은 수도 파리 외곽 주요 간선도로에 트랙터를 세운 채 파리 교통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가 지난 26일 농가를 방문해 디젤 보조금 삭감을 철회하고, 대형 유통업체의 횡포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시위는 계속됐다.
유럽 농민들이 일제히 시위에 나선 것은 EU의 친환경 정책으로 쌓여온 불만 때문이다. EU가 농업 부문 탄소배출을 줄이고 환경오염을 막는다며 2030년까지 질소비료 사용 감축, 휴경 의무화, 살충제 사용 제한 등의 규제를 강화한 탓이다.
영국 더타임스는 “프랑스의 양계 농가에 대한 규제집 분량이 167페이지”라며 “닭장의 최소 너비, 바닥 부분 기울기, 다락문 크기, 들판 울타리까지 규제한다”고 꼬집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비료값이 급등하고, 대형 유통업체의 가격 인하 압박이 이어지며 농민들의 불만은 계속 쌓였다. 독일에선 정부가 지난달 육류, 계란, 유제품에 환경부담금 부과를 추진하자 6000여 대의 트랙터가 베를린에 몰려들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 등이 농업용 경유 면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한다고 지난 18일 발표하자 농민의 불만은 폭발했다.
EU가 추진 중인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와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유럽 각지의 농민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메르코수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농업 대국이 주축이다. EU 농민들은 환경 규제로 높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데, 규제를 받지 않는 남미에서 싼값의 농산물이 쏟아지면 속수무책이라는 게 농민들의 주장이다.
시위가 거세지자 EU는 우크라이나산 수입품에 적용하는 면세 혜택에 상한선을 두기로 했다. 마르가리티스 스히나스 EU 부집행위원장은 31일 “면세 조처의 악영향에 대비해 긴급 수입 제한 조치를 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일/김세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