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아주 고상한 젊은이가 지나가는구먼.”
16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의 길거리. 멋지게 차려입은 한 50대 남성이 지나가는 젊은 남자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젊은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의 옷에는 군데군데 구멍도 나 있었거든요. 중년 남성은 비꼬는 말투로 말했습니다. “이봐, 젊은 친구! 마침 우리가 고상한 문학 얘기를 하고 있었네. 자네도 함께하지 않겠는가?” 주변 사람들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불쌍한 젊은이한테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저런 몰골을 하고 있는데 문학이 뭔지나 알겠습니까. 하하하….”
젊은 남자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중년 남성을 매섭게 쏘아봤습니다. 상대가 여러 명이니 기가 죽을 법도 한데, 남자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독설이 튀어나왔습니다. “글쎄, 문학 얘기는 당신이나 하라고. 그런데 당신이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당신은 맡은 일마다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도망쳐 버리잖아.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텐데. 문학 얘기는 끝까지 할 수 있나 보지?” 말을 쏟아낸 남자는 다시 돌아서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중년 남성 주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습니다. 젊은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거든요. 남성은 한참 동안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원색적이면서도 조금 유치한 감정싸움. 그런데 이 싸움의 주인공, 우리가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 천재를 꼽으라면 늘 한 손에 꼽히는 인물들이니까요. 50대의 남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였고, 20대 남자의 이름은 미켈란젤로(1475~1564)였습니다. 오늘은 이들 두 천재의 대결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과 르네상스 미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끈기가 아쉬운 천재, 다빈치
“이 버튼은 왜 이렇게 생겼어요?” 요즘 아이들은 ‘저장’ 버튼을 보고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저장 버튼의 모티브가 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본 적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용량이 1메가바이트 남짓에 불과했던 플로피 디스크. 처음 나왔을 때야 ‘크기는 작지만 큰 용량을 담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저장장치’로 각광받았지만, 인터넷과 USB를 이용해 훨씬 더 큰 파일을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요즘 아이들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이와 비슷한 감정을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그림을 볼 때 느낀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나 각종 매체에서 봐왔으니 익숙하긴 한데, 사실 따져 보면 ‘정말 잘 그렸는지’ 모르겠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 관점에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이전 유럽에서는 ‘사실적인 그림’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다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이 이룩한 명암법과 원근법 등 획기적인 수준의 혁신은, 사람들이 꽤 실감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었지요.
당시 그림 그리는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빨랐는지, 그중에서도 다빈치의 천재성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빈치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하나였던 베로키오에게 그림을 배웠는데요.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 스무 살 무렵 스승과 함께 ‘그리스도의 세계’를 그리게 됐습니다. 다빈치가 맡은 건 그림 왼쪽 아래의 천사 중 왼쪽. 하지만 이 젊은 제자가 그려낸 얼굴은, 누가 봐도 베로키오가 맡았던 다른 인물들의 얼굴보다 훨씬 아름답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어린 제자에게 실력으로 완패한 베로키오는 이 작품을 완성한 뒤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표현, 공기의 색 표현으로 그림 속의 멀고 가까움을 표현하는 ‘공기 원근법’의 정립, 수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구도, 유화를 비롯한 각종 재료 실험…. 다빈치의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열정적인 실험 정신은 그를 ‘위대한 화가’를 넘은 ‘위대한 천재’로 만들었습니다. 그 모든 바탕에는 현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다빈치의 관찰력이 있었습니다. 이 습작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한번 보시지요.
하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공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업 속도가 느린 화가를 뽑는 대회가 있다면, 틀림없이 우승자는 다빈치”라고. 다빈치의 재주는 너무 많았고, 끈기는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걸핏하면 그리던 작품을 내던지고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일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모나리자조차 배경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말하자면 미완성작입니다.
반면 다빈치의 야망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이는 그의 또 다른 유명 미완성작인 ‘스포르차의 청동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당시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국 등 수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나라의 위엄을 뽐내기 위해 크고 아름다운 미술 작품 제작에 경쟁적으로 몰두했는데, 그중 밀라노를 다스리던 스포르차 가문은 다빈치에게 거대한 청동 기마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당시 청동 기마상에서 말 표현의 ‘정석’은 한쪽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 다빈치는 이런 정석에서 벗어나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획기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앞다리를 모두 들어 올린 말의 모습을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 톤에 달하는 조각상의 무게를 말의 뒷다리만으로 지탱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상 제작은 좌절됐습니다.
미켈란젤로, 라이벌로 떠오르다
이렇듯 완성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워낙 천재성이 뛰어났던 덕분에 다빈치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 거장’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런 평가에는 다빈치의 개인적인 매력도 한 몫 했습니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멋진 옷차림, 뛰어난 언변 등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고 합니다.이런 명성에 도전장을 던진 게 스물세 살 연하의 미켈란젤로입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빈치와 대조적으로 미켈란젤로는 외모가 단정하지 못했고 잘 씻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옷차림도 형편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옷을 잘 차려입었을 때는 그가 죽은 뒤 수의를 입고 있었을 때”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요. 성격은 괴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반사회적”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단점은 미켈란젤로가 오직 예술에만 몰두한 부작용이었습니다. 씻을 틈도, 남의 눈치를 볼 틈도 없이 계속 작품만 만든 사람이었거든요.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누가 봐도 대단합니다. “돌을 깎아서 어떻게 저런 작품을 만들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게 불과 스물세 살 때 완성한 ‘피에타’입니다.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일약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옷자락 주름과 같은 부분의 표현만 봐도 정말이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부드럽고 뛰어나지요.
1499년 피렌체 공화국이 ‘도시를 상징하는 조각’을 새파랗게 젊은 20대의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것도 이런 실력을 인정해서였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지배층이었던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막 공화국으로 탈바꿈한 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렌체는 시민들을 하나로 묶을 ‘도시의 상징’, 우리로 치면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같은 작품을 원했습니다. 주제는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다비드). 강력한 메디치 가문을 몰아낸 시민들의 용기를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피렌체는 재료가 될 거대한 대리석도 준비해 뒀습니다. 길이 5m가 넘는 아주 질 좋은 대리석을요.
하지만 이런 크기의 대리석을 작품으로 만드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이들은 대리석에 흠집만 남긴 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피렌체는 다빈치를 비롯해 여러 거장들에게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넣었습니다. 여기에 미켈란젤로가 뛰어듭니다. ‘이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미켈란젤로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열정과 실력을 어필했고, 피렌체는 마침내 그에게 이 중요한 작품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작업을 맡은 미켈란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그 거대한 흰 돌덩어리를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그의 마음 속에 형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신들린 듯 돌을 깎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말했습니다. “나는 대리석 안에 갇힌 천사를 보았다. 그는 나에게 자신을 꺼내달라고 말을 걸어 왔다. 그래서 나는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돌을 깎았다.”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합니다. 인류 역사상 ‘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딱 하나, 미켈란젤로였다는 것.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완성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조각 작품 중 하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빈치의 라이벌이 나타났다”고요.
다빈치에게는 영 아니꼬운 일이었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자기 라이벌로 불리게 된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이 거대한 조각 작품은 자신이 밀라노에서 완성하지 못한 청동 기마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다빈치는 거대한 작품을 못 만드는데, 미켈란젤로는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들릴까봐 걱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빈치도 다비드상이 대단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그의 노트에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스케치하며 연구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조각은 저급해!” “그림은 속임수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서로를 정말 죽도록 싫어했습니다. 외모부터 성격, 작품 스타일까지 둘은 모든 게 정반대였습니다. 여기에 라이벌 의식까지 개입하면서 둘의 감정싸움은 아주 재미있게 흘러갑니다. 다빈치가 “조각은 저급하다”며 미켈란젤로를 간접적으로 ‘디스’(공격)하고, 미켈란젤로가 “그림은 사기”라며 다빈치를 깎아내린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선공은 다빈치였습니다.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각은 과학이나 예술이라기보다는 기계적인 작업이야. 조각가는 땀을 흠뻑 흘리면서 먼지와 진흙을 뒤집어쓰지. 얼굴은 온통 대리석 가루로 뒤덮이고. 그 모습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제빵사에 가깝지 않나. 반면 화가를 봐. 얼마나 세련됐어. 잘 차려입고 작품 앞에 편안히 앉아서 가벼운 붓을 휘두르면 매력적인 색이 생겨나지. 조각가 집은 먼지 때문에 더러운 데다 망치 소리로 시끄럽고 더럽지만, 화가의 집은 깨끗하고 벽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 걸려 있지. 음악을 듣거나 고상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고.”
‘이 영감탱이가!’ 얘기를 전해 들은 미켈란젤로는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이 무슨 예술이야? 조각을 할 열정이 없는 게으름뱅이, 제대로 예술을 할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과 못 배운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게 그림이지. 조각은 그냥 있는 그대로 만들면 돼. 하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현실을 왜곡해야 하지. 애초에 현실은 입체적인데, 평면에다가 그걸 어떻게 표현한단 말이야? 화려한 색으로 그 사실을 덮어봤자 소용없어. 증거도 있지. 그림은 조각을 닮을수록 사실적이야. 하지만 조각은 그림을 닮을수록 이상해지지. 입체감이 사라지니까.”
그리고 한마디 더. “그림이 조각보다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지능이 어느 정도일지 안 봐도 뻔해. 이해력이 우리 집 하녀만도 못하니 말이야.” 인류 역사상 최고 천재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옹졸한 싸움이 이랬습니다. 기사 첫 부분에 나온 감정싸움도 이런 다툼 중 하나였지요.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당신 같은 인간한테 청동 기마상을 맡긴 그 밀라노 사람은 정말 멍청한 인간이야. 당신이 완성할 리가 없는데!”
영리한 피렌체 사람들은 이런 라이벌 구도를 활용했습니다. ‘저 양반들 좀 보게나. 서로를 저렇게 죽도록 싫어한다니. 경쟁을 붙이면 정말 엄청난 걸작이 나오겠어.’ 그래서 피렌체는 1503년 정부청사인 베키오 궁전을 장식할 거대한 벽화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각각 의뢰했습니다. 피렌체 역사상 거둔 가장 위대한 전투들, 우리로 치면 한산도 대첩이나 살수 대첩의 장면 같은 것들을 정부청사에 그려달라는 것이었지요.
사실 이건 미켈란젤로에게 불리한 게임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도 그림을 배운 적은 있었습니다. 미술 천재인 만큼 실력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본업은 조각이었지요. 그래도 미켈란젤로는 의뢰에 응했습니다. “다빈치에게 질까 봐 도망쳤다”는 말이 죽기보다 싫어서였을 겁니다.
두 거장은 자존심을 건 싸움에 돌입했습니다. 둘의 압박감은 정말 엄청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면서,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이고 서로의 작품을 몰래 참고하기도 하며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빈치는 깃발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우는 기사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전투 전날 벌어진 사건을 주제로 스케치를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는 그림만 보면 다빈치의 작품이 좀 더 인상적입니다만, 전체 작품이 완성됐을 때의 모습은 또 달랐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러 상황 때문에 두 작품은 모두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다빈치의 발목을 잡은 건 그의 실험정신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이 발명한 새로운 종류의 니스를 칠했는데, 이게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작품이 완성되기 전 물감이 흘러내리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더 중요한 건 다빈치가 이 일에 질려버렸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끈기가 좀 부족한 사람인데, 온갖 공을 들인 작품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그 와중에 새로운 중요한 의뢰가 들어오자 다빈치는 작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피렌체를 떠나버렸습니다. 두 거장의 대결은 이렇게 김이 빠졌고, 머지않아 미켈란젤로도 교황의 작품 의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피렌체는 맘대로 작업을 중단하고 가버린 다빈치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피렌체는 이런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다빈치는 큰 돈을 받고 아주 작은 작품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중략) 반면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에서,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두 거장의 승부는 허무하게도 공식적인 무승부로 결론이 났습니다. 어쨌든 먼저 자리를 떠난 건 다빈치고 피렌체 쪽의 성명도 있었으니, 실질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판정승에 가까운 결말이었습니다. 아무리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성실성과 마감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다빈치의 이런 행태는 그나마 다빈치라서 용서를 받은 것이었지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을 겁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다빈치를 넘어선 당대의 주인공으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몰랐습니다. 더 ‘무서운 놈’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요. (다음주 하편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천지창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i>*이번 기사는 Renaissance Rivals: Michelangelo, Leonardo, Raphael, Titian (Rana Goffen 지음)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프랑크 죌너 지음, 최재혁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와 미켈란젤로(질 네레 지음, 정은진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등을 참조했습니다.
*베로키로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두 천사를 다빈치가 그렸다"는 부분은 오독으로 인한 잘못이었습니다. "두 천사 중 왼쪽을 다빈치가 그렸다"로 수정합니다(1월 20일 19시 50분). 천사 중 왼쪽은 다빈치가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베로키오 화실(혹은 그의 제자, 보티첼리라는 기록은 없음)의 작품으로 확인했습니다. 지적해주신 네이버 애독자 tomc****님께 감사드립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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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