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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박근형에 빠져 관객도 '고도'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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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박근형): 이젠 뭐하지?

고고(신구): 기다려야지.

디디: 그래, 근데 그동안 뭘 하냐고?

고고: 목이나 맬까?

분명 연극인데, 발레의 ‘파드되’(2인무)나 ‘피아노 연탄’(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보는 느낌이 든다. 최근 개막한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을 맡은 배우 신구(87·고고)와 박근형(83·디디) 얘기다. 온몸에 땟국물이 흐르는 80대 노(老)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주고받는 대사와 호흡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또 노련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이다. 두 부랑자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도’라는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다.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이는 대사나 상황을 통해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절망과 혼돈을 표현하는 부조리극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연극이 1953년 프랑스 파리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을 땐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지만, 곧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국내에서도 1969년 극단 산울림이 초연한 이후 50년 동안 22만 명(1500회 공연)이 관람했다. 이번 공연은 산울림이 아니라 파크컴퍼니와 오경택 연출이 짰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핵심은 고고와 디디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력인데, 이번 공연만큼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신구와 박근형은 이번에 처음 같은 무대에 섰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두 사람은 앞뒤가 맞지 않는 대사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어수룩한 고고와 디디의 모습을 능청스럽게 표현했다.

연극을 보면 프랑스 초연 때 나온 혹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고와 디디는 고도라는 인물을 수십 년째 기다리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언제 오는지, 정말 오는 게 맞는지도 알지 못한다. 오늘이 토요일인지 목요일인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헷갈린다. 그 와중에 신구는 바지를 졸라맨 허리끈으로 목을 매려다가 바지가 흘러내려 객석에 웃음을 유발한다. 촐랑거리는 박근형의 몸짓에서 무게 있는 원로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코미디극이다.

하지만 두 배우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우스운 작품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고고와 디디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숨겨진 무기력함과 고통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웃기면서도 고통스럽고,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두 배우를 통해 고스란히 객석에 전달된다.

디디가 노예를 잔인하게 다루는 포조(배우 김학철 분)를 보고 “수치스럽다!”고 외치는 부분이나, 극의 말미에 고고가 “우리는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미친 채 죽어간다”는 대사를 뱉을 땐 장내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어느새 관객들도 고고와 디디에 몰입해 고도를 함께 기다리게 된다. 고고와 디디처럼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가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신구는 지난해 급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아 심장박동기를 착용한 상태지만 1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두 달간 ‘원 캐스트’로 무대에 선다. 박근형도 마찬가지다.

포조의 노예 럭키를 연기하는 배우 박정자(81)의 존재감도 만만찮다. 처음 등장할 때 별다른 대사 없이 허리를 구부린 채 공허한 표정만 짓는데, 그것만으로도 무대를 장악한다. 무의미한 대사를 연속으로 터뜨릴 때의 폭발력도 압권이다. 이 배역을 여성에게 맡긴 건 국내에선 처음인데, ‘신의 한 수’로 볼 수도 있겠다.

195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교도소에서 공연한 이 연극이 끝나자, 1400명이 넘는 죄수가 “고도는 자유다!” 혹은 “빵이다!”라고 외치며 열광했다고 한다. 신구는 개막 전 인터뷰에서 본인에게 고도는 ‘희망’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 내년 2월 18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을 찾으면 무언가 떠오르지 않을까.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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