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민지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왜곡된 다양한 정서가 스며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다양한 진단과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예문도 그중 한 대목이다. 평범한 문장 같지만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다. ‘피식민지’가 그것이다.
주권 잃은 나라는 ‘식민지’가 바른말
이 말이 자꾸 걸린다. 학교에서 ‘식민지’라는 단어를 배운다. 우리 역사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단어다.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돼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나라.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본국에 대한 원료 공급지, 상품 시장, 자본 수출지의 기능을 하며, 정치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국어사전에서는 식민지(植民地)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은 ‘피식민지’가 아니라 ‘식민지’다.식민지에 대응하는 말은 ‘식민국(植民國)’이다. ‘식민지를 가진 나라’라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식민지였다. 일본은 식민국이었다. 그래서 ‘나라 국(國)’ 자를 못 쓰고 식민지(地)라고 부른다. 국권을 상실한 곳, 즉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럼 피식민지는 무엇일까? 틀린 말이다. 식민지가 바른 말인데, 여기에 ‘피(被)-’를 붙여 ‘그것을 당함’이란 의미를 덧칠했다. 아마도 의미를 확실히 드러내고 싶은 데서 비롯된 ‘심리적 일탈’일 것이다. 요즘 우리말 교육이 제대로 안 돼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말에서 접두어 ‘피(被)-’는 ‘그것을 당함’의 뜻을 더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상속인과 피상속인, 선거권과 피선거권, 수식어와 피수식어, 정복과 피정복, 지배와 피지배 같은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능동 의미를 피동 의미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말의 구성에 과학과 논리가 담겼다는 뜻이다. ‘점령지와 피점령지’는 말이 되는데, ‘식민지와 피식민지’는 말이 안 된다. 요즘은 이 둘의 관계를 구별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말 ‘피(被)-’의 용법을 자꾸 잃어가는 것이다.
‘지명자’와 ‘피지명자’ 구별해 써야
‘식민국’이 있기 때문에 그 속국을 ‘피식민국’으로 표현하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피식민국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주권을 잃어 이미 국가가 아닌데, 피식민국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저 식민지일 뿐이고, 그리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표현이다.그 연장선에서 피식민지란 말도 틀렸다. 우리말 조어법을 무시한 비논리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피식민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능동적 의미를 띠어야 한다. 그래야 접두어 ‘피(被)-’와 결합해 피동의 의미로 바뀐다. 식민지가 이미 속국인데, 거기에 ‘당함’을 더해봐야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는 이 말이 올라 있다. 우리말 접두어 ‘피-’의 세력이 자꾸 약화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령 요즘 상속인과 피상속인을 구별할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다고 이 말이 어쩌다 쓰이는 이른바 ‘고급 어휘’도 아니다. 서울 아파트 평균가격이 12억 원을 훌쩍 넘은 요즘은 누구나 상속세를 생각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가 늘 화제로 삼는, 일상의 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상속인(재산이나 기타의 것을 물려받는 사람)과 피상속인(재산 등 자기의 권리, 의무를 물려주는 사람)을 구별해 쓰는 이는 드물다. 심지어 반대로 알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접두어 ‘피-’의 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말 교육에 소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어에서 nominator와 nominee를 구분하듯이 우리말에서도 ‘지명자’와 ‘피지명자’를 구별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은 이를 무시하고 그저 한 묶음으로 ‘지명자’로 쓸 수 있게 해놓았다. ‘내정자’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정교하고 섬세하지 못하다. 이런 세태는 자칫 우리말의 퇴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