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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혁명 시대, 삽화를 예술로 끌어올린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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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인쇄술이 태동한 15세기 유럽. 책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글을 읽을 수 없던 대다수 사람에겐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다. 삽화는 인쇄술 발달의 혜택이 일반인에게까지 닿을 수 있게 해준 수단이었다.

독일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문맹인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한 삽화를 독자적 예술 장르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다.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기면서도 예술가로서 작품 세계를 구현했고, 자신의 굴곡진 인생과 미지의 세계를 판화로 표현해냈다.

뒤러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인천 송도동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열린다. 19일부터 시작하는 ‘문자와 삽화-알브레히트 뒤러’ 특별전이다. 뒤러의 ‘3대 목판화’와 ‘4대 동판화’가 1996년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모였다. 뒤러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판화 55점도 만나볼 수 있다. 세계문자박물관은 왜 삽화를 전시하게 됐을까.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영상과 이미지가 글보다 익숙해진 요즘, 문자와 그림의 관계를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다. 김성헌 국립세계문자박물관장은 “삽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뒤러의 작품 세계를 통해 문자와 그림의 관계를 되돌아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뒤러의 3대 목판화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 ‘대수난’ ‘요한계시록’ 등 성경의 내용을 묘사한 작품들이다. 특이한 점은 성경의 내용을 당시 모습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유럽 문화를 반영해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성모와 요셉의 약혼 장면을 그린 ‘마리아의 약혼’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뒤러가 생활한 독일 뉘른베르크의 복식과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뒤러는 자신의 목판화가 연작 형태로 보이게도 했다. 성모가 예수를 잉태한 순간을 그린 ‘수태고지’ 작품 왼쪽 하단 계단에는 자그마한 악마가 숨어 있다. 이 악마는 성경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장한다. 예수의 죽음 이후 세계의 종말을 그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면을 담은 작품에 이르면 거대한 용이 돼 다시 등장한다.

전시 하이라이트는 4대 동판화가 걸려 있는 후반부다. ‘아담과 하와’ ‘기마병’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멜랑콜리아Ⅰ’ 등으로 목판보다 섬세한 질감 표현이 특징이다. ‘멜랑콜리아Ⅰ’은 어머니를 잃은 뒤 상실감에 시달린 뒤러의 자화상으로 알려졌다. 화면 오른쪽 하단 뒤러 주위로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구와 육면체, 영혼의 해방을 의미하는 사다리가 놓여 있다. 작가 본인의 강렬한 자의식을 반영한 것일까. 모든 작품에는 뒤러를 상징하는 ‘AD’ 이니셜이 각인돼 있다.

전시를 기획한 양진희 학예사는 “극심한 우울을 겪으면서도, 작업 활동을 계속하고자 했던 창작자의 양면적인 고뇌를 나타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3월 31일까지.

인천=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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