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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더스틴 호프먼이 촬영 전 여배우를 때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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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개봉한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촬영할 때였다. 카메라가 돌기 전 더스틴 호프먼이 상대 배우 메릴 스트리프의 뺨을 후려쳤다. 스트리프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영화에 사실적으로 담기 위해서였다. 물론 상대의 동의는 없었다. 호프먼은 1976년 개봉한 ‘마라톤 맨’을 찍을 때도 그랬다.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밤을 꼴딱 새우고 뜀박질했다. 이 젊은 동료 배우에게 질려버린 로런스 올리비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 친구, 그냥 연기를 해보지 그래?”

로버트 드니로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영화 ‘분노의 주먹’에서 권투 선수를 연기하기 위해 근육을 6.8㎏ 늘렸다. 촬영 기간 내내 보철물을 착용했고, 항상 캐릭터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했다. 영화 후반부 몰락한 중년의 캐릭터를 표현할 땐 체중을 27㎏ 불렸다. 호평이 쏟아졌다.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상반된 평가도 나왔다. 뉴요커의 폴린 케일은 “이 영화에서 드니로가 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연기가 아니다”고 했다.

메소드 연기는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20세기를 지배한 연기 테크닉’이란 부제를 단 <메소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아이작 버틀러는 한때 메소드 연기를 추구한 배우였다.

‘메소드 혁명’은 1890년대 러시아에서 싹이 텄다. 창시자는 러시아 배우 겸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다. 그는 위대한 연기를 꿈꿨다. 연극 무대 위에서의 틀에 박힌 연기가 거슬렸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시킨의 경구에서 영감을 얻었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정념에 대한 진실, 감정의 핍진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성이 극작가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진짜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한 연기를 추구했다. 이런 방식은 옛날에도 있었다. 하지만 폄하됐다.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19세기 말까지 연기는 기술적인 것이어야 했다. 스타니슬랍스키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한 극은 러시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유럽에 이어 미국 투어를 떠났다. 미국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새로운 연기 방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1931년 미국 뉴욕에서 창설한 연극집단 ‘그룹 시어터’가 여기에 메소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계도 메소드 배우를 환영했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연기는 연극 무대보다 세심하고 내밀한 연기를 요구했다. 말런 브랜도, 제임스 딘, 드니로 등으로 이어지는 메소드 배우의 계보가 탄생했다.

한편 메소드는 배우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진실한 감정을 위해 개인적인 고통, 슬픔, 분노 등 트라우마 같은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연기를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했다. “연기의 즐거움을 앗아갔다”는 배우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메소드 배우들은 항상 극적인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코엔 형제, 데이비드 린치, 팀 버튼 등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메소드의 인기가 시들해진 이유다.

메소드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제 모든 배우는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진실한 연기를 추구한다. 저자는 “메소드는 단순히 연기론이나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울먹이게 만드는 든든한 방법이 아니다”며 “변화를 불러오고 혁명을 일으킨 현대적인 예술운동이자, 20세기의 위대한 생각”이라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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