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오케 간 날 기억해요? 거기 여자 두 명 있었잖아요. 그중 키 작은 여자를 만났는데 거의 결혼할 뻔했거든요.”
“왜 안 했어?” “(전화)번호를 잃어버렸거든요.” “전화번호부에 나오잖아?” “이름을 몰라요.”
오는 20일 개봉하는 핀란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사진)에서 남자 주인공 홀라파(주시 바타넨 분)가 나이 많은 직장 동료 한스네와 맥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다. 두 남자는 사뭇 진지하면서도 무표정하게 툭툭 말을 주고받는다.
핀란드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스무 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은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다. 헬싱키를 배경으로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 근로자인 두 남녀의 척박한 노동 환경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역경을 이겨내고 기적처럼 서로를 찾는 이야기를 동화같이 펼쳐낸다.
여자 주인공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야 할 샌드위치를 집에 가져갔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해고당한다. 홀라파는 이 공장, 저 공장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동자다. 어느 금요일 밤 동료와 함께 놀러 간 가라오케에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짧지만 강렬한 눈길을 나눈다.
두 사람은 안사가 주방 보조원으로 일하게 된 한 주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경찰이 그 주점 주인을 마약 판매 혐의로 체포하는 현장을 함께 목격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안사가 이곳에서 처음 월급을 타는 날. 홀라파는 월급을 못 받게 된 안사에게 커피를 사주고 극장에 데리고 가 영화도 함께 본 뒤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또 만날까요? 근데 이름도 모르네요.” 안사는 “다음에 알려줄게요”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 홀라파의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안사가 잠시 일한 주점 벽 달력에는 ‘2024년’이라고 적혀 있다. 엄밀히 따지면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두 사람은 통화 기능만 겨우 되는 구식 휴대폰을 사용한다. 안나 집에 있는 구형 라디오에서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습하고 두 나라가 전투를 벌여 사상자가 발생한 소식이 실시간 뉴스처럼 계속 흘러나온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6년 만에 내놓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동안 주로 폭력적인 영화를 만들었는데 인류를 파괴하는 전쟁에 시달리자 마침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에 관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자연, 삶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로베르 브레송, 오즈 야스지로, 찰리 채플린에게 소소한 경의를 표한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 혹독한 노동 현실과 함께 두 외로운 영혼의 사랑에 대한 갈망, 동료와의 연대 등을 잘 녹여냈다. 후반부에 안사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안사가 청소원으로 일하게 된 공장 관리자가 주워온 유기견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훌라파가 개 이름을 묻자 안사는 다정하게 부른다. “채플린!”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