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어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말로, 이것이야말로 효도의 첫걸음이라고 합니다. 저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건희 회장보다 승어부한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2020년 10월 28일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영결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의 60년 지기로 알려진 김필규 전 KPK통상 회장은 추도사를 읽어내려갔다. 우리 관심은 그중 한 대목에서 나온 ‘승어부(勝於父)’에 있다. ‘승어부하다’란 동사로도 쓰이는 이 말은 ‘아버지보다 낫다’는 뜻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우리말이다.
‘승어부’는 남이 칭찬으로 해주는 말
이 말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재용 삼성 회장은 그해 말 세밑,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의 최후진술에서 다시 ‘승어부’를 끄집어냈다.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 국민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 이것이 이뤄질 때 저 나름대로 승어부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추도사의 ‘승어부’를 차용했다. 이건희의 승어부를 계승해 이재용의 승어부를 이루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셈이다. 당시 언론에서 이 말을 받아 ‘이재용의 승어부’니, ‘승어부 선언’이니 하며 크게 보도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재용의 ‘승어부’와 추도사에 나온 그것은 맥락이 좀 다르다. 우리가 이 말에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승어부’는 우리말에서 독특한 용법을 보이는 말 중 하나다. 일상의 말은 아니고, 이른바 고급 어휘다. 언론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이 말을 써왔다. 그런 까닭에 말의 의미와 쓰임새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20년대 국내 신문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써온 말이다.
추도사에서는 이건희 선대 회장을 승어부한 인물로 치켜세웠다. ‘승어부’는 아비보다 뛰어난 자식을 두고 제삼자가 칭찬으로 해주는 말이다.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청출어람(靑出於藍)’과도 비슷하다. 그러니 ‘승어부’는 스스로 하기엔 민망한 말이다. 이재용 회장의 경우도 (남으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과 소망을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미망인’은 남이 쓰면 실례되는 말
‘승어부’에 비교되는 말은 ‘불초(不肖)’다. 흔히 ‘불초 소생’이라 할 때의 그 ‘불초’다. ‘아니 불(不), 닮은 초(肖)’로 ‘(아비를) 닮지 않았다는 뜻에서,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부족한 게 많아 부모를 본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승어부’와는 반대되는 개념을 담았다. 동시에 일인칭 대명사로는 ‘아들이 부모를 상대하여 자기를 낮춰 이르는 말’로 쓰인다. 이 ‘불초’는 자식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때는 겸손함을 드러낸다. 남이 누군가를 가리켜 ‘불초하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누군가가 아비를 따라가지 못함을 지적하는 말이다.‘승어부’는 또 ‘미망인’과도 비교된다. ‘승어부’가 남이 써주면 좋은 말인 데 비해, ‘미망인’은 남이 쓰면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미망인’도 현실 어법에서 두 가지 쓰임새를 보인다. ‘다른 사람이 홀로 된 남의 부인을 가리킬 때’와 ‘홀로 된 부인이 스스로를 가리켜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미망인(未亡人)’은 그 뜻을 알고 나면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이다. 글자 그대로 풀면 ‘미처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다. 지난 시절 남편을 여읜 여자가 남들에게 스스로를 낮춰 이르던 말이다. 이마저도 요즘 기준으로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낮춰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돌아가신 이의 부인을 두고 ‘미망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현실언어’라는 보호막 안에서 두루 통용되는 게 지금의 쓰임새다.
‘불초’도 예전의 도덕 기준에 따른 말이다. 요즘 그런 식의 자기 겸손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승어부’와 마찬가지로 글자 그대로의 뜻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승어부’와 ‘불초’, ‘미망인’이 현실 어법에서 어떤 쓰임새로 정착될지 지켜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