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이익을 챙기지 말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간선거를 앞둔 작년 11월 막대한 이익을 거둬온 석유기업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휘발유 값이 치솟으면서 국민의 물가상승(인플레이션) 부담이 최고조에 달할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전쟁통에도 돈 버는 주체는 늘 있게 마련이라지만 '이익 환원' 등 도의적 책임을 실천하지 않는 기업들이 고까웠던 것이죠.
바이든 대통령은 이 발언과 함께 '횡재세' 도입 가능성을 암시했습니다. 횡재세란 뜻밖의 대외 변수 등으로 가만히 앉아 추가 이익을 거둔 기업에 물리는 세금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번 돈은 사회에 되돌려줘야 마땅하단 취지에서 생겨난 개념입니다.
하지만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민간기업에 세금을 더 물린다는 게 이견이 갈릴 사안이죠. 정치 갈등과 더불어 횡재세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탓에 미국 내 횡재세 도입은 아직입니다. 이런 불확실성은 엑손 모빌과 셰브론 등 미 정유주 투자자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악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도 '횡재세' 논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가장 먼저 겨낭한 타깃은 정유주가 아닌 은행주입니다.
올 초 상승분 전부 반납한 국내 '은행주'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KRX 은행지수는 최근 한 달간 1.46% 빠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코스피지수가 1.2% 오른 점을 감안하면 시장도 못따라가는 상황인 겁니다. 최근 6개월로 기간을 넓혀보면 코스피가 0.63% 밀릴 때 KRX 은행지수는 약 5% 올랐는데요. 이렇듯 연초 강하게 올랐던 은행주가 최근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은행주들을 모은 상장지수펀드(ETF)의 최근 한 달 수익률도 KODEX 은행(-0.77%), TIGER 은행(-1.2%) 등으로 부진합니다.금리상승 수혜주, 배당주, 경기방어주 등 어떤 콘셉트로도 주가가 뜨지 않자 투자자들은 망연자실한 상황입니다. 온라인 종목토론방과 커뮤니티 등에는 '국내 은행주는 투자할 게 못 된다. 돈을 많이 벌수록 욕 먹는 기업이기 때문', '저평가로 보여 잔뜩 들어갔다가 스트레스로 탈모 왔다', '괜히 은행주 들어갔다가 속만 끓는다. 죄없는 주주들에도 횡재세 물리는 격', '진짜 횡재세 도입할까 두렵다', '은행 좀 그만 때려달라' 등 푸념 섞인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은행주는 연초 강한 반등을 보였습니다. 배당락일 이후 과매도 구간에 들어섰던 상황에서 주주환원책 기대감이 투자심리를 확 끌어올린 겁니다. 은행들은 4분기 실적발표와 함께 저마다 중장기 자본정책과 주주환원계획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급진적인 배당정책 변화를 기대했던 투자자들의 실망 매물이 나온 데다, 이차전지·로봇 등의 테마주가 주식시장의 대세가 된 탓에 은행주 대부분이 연초 상승분을 반납했습니다.
'찬 바람 불 땐 은행주'라는 증시격언마저 무색해지는데요. 증권가는 "실물 경기와 은행 실적이 상반되면서 당국에 (은행들에 대한) 규제의 빌미를 내줬다"고 분석했습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5대 은행들의 작년 이자이익은 36조2071억원으로 2년 전보다 36%가량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이들 은행의 작년 상여금 총액도 20%가량 늘어나 약 2조3000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실물 경기가 침체된 가운데 은행들이 이자이익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하니 민심이 안 좋아질 만 하죠.
여야 이견 있지만 원론선 공감대…"은행들, 고통 분담해야"
현재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건 횡재세입니다. 현재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은행에 횡재세를 부과하는 안을 밀고 있습니다. 당 정책위 부의장인 김성주 의원은 지난 11일 '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안'과 '부담금 관리 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는데요. 고금리 덕에 금융사들이 벌어들인 초과 이익의 일부를 부담금(상생금융 기여금) 형태로 정부가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직접세 부과 형태가 아니므로 횡재세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취지가 같아 '횡재세법'이라고 불립니다.개정안에 따르면 환수한 기여금은 금융 취약계층과 소상공인들의 금융 부담을 줄이는 직접 지원사업에 쓰이게됩니다. 이 개정안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과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해 야당 의원 총 55명이 동참했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10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유가 상승과 고금리 때문에 정유사와 은행들이 사상 최고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며 "횡재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민주당의 적극 행보에 여당은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대놓고 총선을 의식한 '포퓰리즘 법안'이라는 건데요.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의 횡재세법 발의는 대중 정서를 이용한 것"이라면서 "민주당은 세금 형식이 아닌 부담금 형태로 걷겠다지만 화장을 아무리 해도 민낯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 당정은 은행 초과이익 문제에 대해 시장경제 원리에 맞는 방향으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각론을 보면 여야의 이견이 부각되고 있지만 실상 원론에선 공감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 들어 은행권을 향해 수위 높은 발언을 해왔기 때문인데요. 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한 소상공인의 말을 인용해 "마치 은행의 종 노릇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과점 구조에서 큰 이자이익을 챙기는 은행들을 강하게 비판한 겁니다. 윤 대통령은 앞서 이달 초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선 "은행의 독과점 행태는 정부가 그냥 방치해선 절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올 2월에는 "서민들이 고금리로 힘들어하는 와중에 은행들은 돈 잔치와 이자장사를 벌이는 중"이라며 직언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고금리·전쟁 속 '돈 버는 기업들'…각국 횡재세 도입 나서
우리나라 밖의 상황은 어떨까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관련 논의에 불이 붙으면서 해외 주요국은 작년 초과이익세를 도입했습니다. 초유의 감염병 사태로 기업과 개인의 경제 활동이 제약을 받으면서 각국은 유동성 공급을 위한 정책들을 펼쳤는데요. 이런 가운데 인플레이션과 러·우 전쟁 등으로 원유 가격이 가파르게 올라 석유와 에너지 기업들이 큰 돈을 벌었습니다. 물가상승 억제를 위한 후속조치로 각국 중앙정부가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은행들도 달콤한 이자맛을 봤고요. 외부요인으로 축적한 부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주요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환수에 나선 겁니다.
미국은 법안 발의 이후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지만 유럽연합(EU)은 일시적인 부담금을 부과하는 지침을 발표했고 대부분의 EU 국가는 초과이익세를 도입했습니다. 스페인(은행·에너지기업)과 헝가리(석유·에너지기업)는 세금 형태로, 프랑스(매출의 75%가 원유·천연가스·석탄·정유인 기업)는 부담금 형태로 돈을 걷고 있습니다. 영국은 2028년까지 한시적으로 정유·전기 부문에 세금을, 중국은 영속적으로 에너지기업에 부담금을 물리고 있습니다. 최근 사례를 보면 지난 8월 이탈리아가 1년 동안 은행의 순이자 이익의 40%를 횡재세로 부과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은행주 최대 변수' 횡재세 두고 이견…주주들 대응 어떻게
횡재세 도입 여부는 은행주 투자자들에게 큰 변수입니다. 주요국이 도입하는 정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도 따라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국내에도 횡재세를 도입할 만한 상황인지 짚어볼 필요는 있겠는데요. 올 8월 한국세법학회 조세법연구에 실린 논문 '초과이익과 횡재의 본질에 따른 과세체계 고찰'에선 실제로 대외 예외적인 상황이 특정 기업들의 초과이익을 유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습니다.그 결과 김재경·정 훈 저자는 "은행은 금리인상이 본격화된 2022년, 증권업은 코로나19 대응으로 유동성 확장정책이 시행된 2020~2021년, 원유산업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한 2021년 이후, 의료제조업은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2021년부터 매우 높은 경영성과를 보이고 있어 상관관계가 어느정도 있다고 분석됐다"고 짚었습니다. 정유사와 은행들이 대외변수 덕에 호실적을 냈다는 게 확인된 겁니다.
다만 이들은 한국의 횡재세 도입에 대해 유보적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초과이익을 어느 기업이든지 얻을 수 있단 관점에서 보면 특정 산업만을 과세 대상으로 정해두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입니다.
일각에선 아무런 노력 없이 우연으로 얻은 이익은 일부 정부가 환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김용민 진금융조세연구원 대표는 "앉아서 번 초과분을 세금으로 걷어서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면서 "부담금으로 걷게 되면 용도가 한정적이어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 수 있으니 조세로 걷어야 한다. 여야가 큰 틀에선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횡재세 도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증시에서 최대 악재는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횡재세 도입 여부가 불투명한 지금 은행주 투자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금융시장 절대 강자인 은행권에 실제 횡재세를 부과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봤습니다. 때문에 불확실성이란 악재보단 주주환원 기대감이라는 호재에 시선을 둬야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설용진 SK증권 연구원은 "은행 초과수익 환수 논의 등 규제 리스크에 따른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점은 부담"이라면서도 "은행의 손실흡수능력의 핵심인 보통주자본비율(CET1) 자본이 증자와 이익에 의해서만 확충될 수 있단 점을 감안하면 투자자 이탈과 이익 감소를 유발할 수 있는 횡재세보단 추가 준비금 적립 등이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습니다. 또 "준비금 적립을 하더라도 기존 총 주주환원율을 유지하는 데 무리는 없을 전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증권사 연구원도 "횡재세 도입 땐 은행주에 최대 악재일 수 있지만 이 경우 반발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면서 "업권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큰 탓에 은행들의 이익체력 대비 과한 저평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총선 이후로는 주주환원 노력이 부각돼 주가가 반등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지금부터 은행주를 사모으길 권한다"고 밝혔습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