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이 ‘인생 영화’로 꼽는 ‘해리포터’에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과 사진이 등장한다. 초상화 속 인물이 확 튀어나와 말을 건네고, 뒷배경도 휙휙 바뀐다.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럭스: 시적 해상도’에선 이런 영화 같은 일이 현실이 된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소나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붉은색, 보라색 꽃이 피어난다. 소나무 뒤 새하얀 설산은 이내 황금빛 햇살로 노랗게 물든다.
분명 회화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작품은 스위스 출신 작가 피필로티 리스트가 영사기를 통해 유화 위에 영상을 덧입힌 것이다. 한 번 완성하면 바뀌지 않는 회화의 특성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영상의 특성이 절묘하게 녹아든 작품을 보다 보면, 왜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그렇게 호평받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디어아트 전시 ‘럭스: 시적 해상도’가 요즘 ‘몰입형 전시’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요즘 유행하는 몰입형 전시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그대로 디지털로 제작해 전시장에서 틀어주는 게 대부분이다. 쉽게 볼 수 없는 거장의 작품을 거대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단순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와 달리 ‘럭스: 시적 해상도’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들로 라인업을 꾸리긴 했지만 신선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국내 전시 기획사 숨엑스가 202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선보였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방문하며 흥행했다. 런던 이후 2년 만에 열린 서울 전시에서는 당시 런던에서 소개한 작가뿐 아니라 국내외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더해졌다.
어두운 전시장에 펼쳐진 ‘기계 산수화’는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깊이 고찰한 결과여서다.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때 시각효과 디렉터를 담당한 카오 유시가 제작한 이 작품은 사실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동양 수묵화 이미지를 학습시켜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를 구현했다. 전통적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낸 산과 구름이 역동적인 픽셀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압도적이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