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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칼럼] '멋쟁이 가구' 서탁을 사랑했던 박서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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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탁(書卓)이라는 고가구가 있다. 풀어 쓰면 ‘책 탁자’인데 말 그대로 책을 올려두기 위한 쓰임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책장과 탁자는 보통 아래위로 세 칸 이상 층이 분할돼 있는 키가 큰 입식 가구고, 서탁과 서안(書案), 경상(經床) 같은 것은 좌식 가구다. ‘앉은뱅이책상’을 생각하면 딱 맞다. 서안과 경상은 좌식 책상인데 천판(天板), 다시 말해 맨 윗면, 책을 펼쳐서 보고 글도 쓰고 하는 면의 양쪽 귀가 위로 말려 올라가 있으면 경상, 일직선으로 평평하면 서안이다.

서탁은 세월을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긴 것은 좌우 너비가 180㎝가 넘는 경우도 있는데, 다리는 양 끝에 하나씩만 달아야 하니 두꺼운 나무를 쓸 수 없다. 모양새도 어찌 그리 담백 간결한지. 서울옥션 메이저 경매 출품 수량으로만 봐도 서안과 경상이 각각 약 마흔 번, 쉰 번 출품될 동안 이런 서탁은 대여섯 번 정도 출품됐으니, 귀하디 귀하다. 서탁은 ‘멋쟁이 가구’다. 장식 하나 없이 단순한 조형미로만 승부 보는 이 고가구들을, 구력 있는 어른들이 ‘멋쟁이’라고 불렀다. 지난 2월, 서울옥션 경매에 서탁 하나가 오랜만에 나왔다. 좌우 폭이 165㎝쯤 되는, 단정한 맛이 있는 서탁이었다. 멋쟁이는 멋쟁이를 알아보는 법.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았더니 “박서보예요”라는 목소리였다. 용건은 그 서탁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께선 이미 연희동 기지(GIZI), 햇살이 잘 드는 2층 창가에 시원한 비례의 널찍한 멋쟁이 서탁을 갖고 계셨다. 떨렸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필자의 성격을 알고서 물어오신 것일 테니,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잘 나오지 않는 것이고, 선생님께서 워낙 이런 걸 좋아하시니 사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이미 연희동에 가지고 계신 게 훨씬 좋으니 시작가 정도에서 해보면 어떨까요?” 연희동에 있는 것이 더 좋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당신께서 갖고 계신 서탁의 비례와 멋에 대해 자랑하시더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권대섭 선생 백자가 왔는데 아주 그럴듯하니 구경하러 와요”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며칠 뒤 경매 결과를 보니, 그 서탁은 시작가에 낙찰돼 있었다. 전화도 한 번 더 왔다. 손맛이 살아있는 귀얄무늬 분청사기를 구하고 싶다는 말씀을 덧붙이며 재차 놀러 오라 하셨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즈음 암 투병 사실을 밝히신 데다 신작 열정을 불태우시기에 실례가 될까 싶어 작업실 방문을 몇 번 미뤘더니, 바깥 행사에서 얼굴도장만 찍은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알 수 없는 쓸쓸한 감정에 휩싸였다. 또 한 명, 고미술 애호가의 상실이 주는 헛헛함과 두려움이었다. SNS에 올린, 박서보 선생님 생전에 이뤄졌던 작업실 투어 후기 사진에서 수운 유덕장(岫雲 柳德章, 1675~1756)의 묵죽도(墨竹圖) 아래에 자리 잡은 그 서탁을 보았다. 대나무 그림 아래, 그 자리에는 단정한 맛의 이 서탁이 딱 맞았다. 이게 고가구의 매력이다.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모두 제자리가 있다.

이제 역사가 되신 멋쟁이 어르신의 서탁을 보면서, 막연히 ‘다음 멋쟁이가 나타나겠지, 아니면 나라도 멋쟁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진짜 멋쟁이가 되기 위해선 돈도 있어야 하고, 지식은 필수고, 할 말은 하는 용기와 비판을 받아내는 배포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대를 관통하는 멋을 알아보는 날 선 안목은 기본이겠다. 큰 어른의 영향력은 햇빛과도 같다. 필자의 머릿속에도 이렇게 한 줄기 따사로움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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