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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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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는 얼굴이다.

몸 없는 얼굴, 몸의 부재를 망각하게 하는 얼굴이다.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오거나 분리되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얼굴, 얼굴이란 처음부터 단지 얼굴로서만 존재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얼굴, 얼굴 자체로 완결된 양식의 얼굴이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의 살아있는 얼굴이다. 맨손으로 더듬더듬 흙을 덜어내며 발굴한 것 같은 얼굴, 앙상한 골조 위로 처덕처덕 이목구비와 살을 붙여 만들어 낸 것 같은 얼굴이다.

약간의 광택도 거절하며 버석하게 말라버린 불균질한 황갈색 표면의 얼굴, 빛 아래서도 광택 없이 그림자만을 거느린 표면이다. 표면만을 가진 얼굴이다. 얼기설기 맞물려 서로를 지탱하는 테라코타 살들의 얼굴이다. 이음매와 균열로 가득한 얼굴이다. 균열이 표정을 이루는 얼굴. 틈새로 스며드는 시간, 표면 위로 쏟아지는 시간을 거절하지 않는 얼굴.

오른쪽 이마를 따라 눈썹으로 흘러내리는, 미간을 가로지르는, 왼쪽 눈썹으로 이어지며 안료로 덮인 레이어 아래의 표면을 드러내는 균열을 가진 얼굴. 눈꼬리에서 이마로 넓게 거슬러 올라가며 왼쪽 얼굴에 기기묘묘한 인상을 실어주는 균열의 얼굴. 눈 밑의 연약한 살갗을 삼각형으로 가로지르며 입꼬리로 떨어지는, 다시 왼쪽 턱 끝으로 이어지며 표정을 베어버리는 균열의 얼굴. 오른쪽 입꼬리에서 시작해 뭉뚱그려진 귀쯤으로 이어지는 균열, 손가락 한마디 만한 작고 길쭉한 구멍과 만나 그 안의 어둠을 보게 만드는 지시선 같은 균열을 가진 얼굴이다.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는 눈동자. 울퉁불퉁하고 납작한 이마. 얼굴 위로 따개비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들. 끝이 둥근 원뿔형 뒤통수를 이루는 잿빛의 조그만 흙덩이들, 얼굴을 향해 밀려오는 물결처럼 드리워진 머리카락 아래의 얼굴이다. 벽에 기대어 선 얼굴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올림머리와 맞붙은 얼굴이다. 왼쪽 관자놀이에, 콧대 한가운데에, 코끝에, 이마의 중심과 머리카락이 만나는 자리에, 입술 아래에, 얼굴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들을 가진 얼굴이다. 단단하고 깨지기 쉬운 얼굴이다. 마모를 따르는 얼굴이다. 매끈한 구석이 없는 표면이다.

도모는 영원이 고여 있는 얼굴이다. 영혼 같은 것을 가운데 두고 둘러싼 흙의 얼굴이다. 영원을 가둔 얼굴이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얼굴. 구멍을 가진 얼굴. 구멍을 감싸는 표면으로써의 얼굴. 희고 커다란 전시장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그 작고 검은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도모는 공간이다.

지난 몇 주간 도모의 표면과 내부를 샅샅이 돌아본 바, 적어도 지금은, 이것은 나만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 외의 생명체라곤 개미 새끼 한 마리 마주친 적 없다. 도모 어딘가에 녀석이 있다면, 그것은 녀석보다 작은 부피와 질량을 가진 물질인 나로서는 모를 수 없는 사건일 것이다.

도모의 주변부를 서성이는 나 이외의 존재들, 그러니까 인간들은 도모를 조각이라거나 작품이라거나 얼굴이라거나 저 여자라거나 여자의 머리라거나 하는 식으로 부르는 것 같다. 도모는 얼굴이고 사물이고 여자이고 나의 도모는 공간이다. 도모는 매끈한 직선으로 닦인 복도나 반듯한 벽, 정확한 모서리를 가진 방이 없는 공간이다. 도모는 수많은 언덕과 홈을 가진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얽혀 있는 공간이다.

나는 온몸으로 도모를 감각하며 도모의 안팎을 걷는다. 휴식한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광원을 추적한다. 불빛이 오가는 것을 본다. 도모를 느낀다. 나는 여기서 안전함을 느낀다. 먼지와 굴곡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도모의 표면에서, 이 불균질한 황갈색 위에서는 나의 갈색 몸 역시 울퉁불퉁함을 구성하는 하나의 자그마한 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성이나 알아채기 쉬운 가시성을 지니지 않은 미미한 몸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여기 있다. 그리고 내 앞의 저 인간. 구부정하게 목을 수그린 채 자신에게 허락된 거리를 유지하며 이 구멍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저 인간. 이 구멍 안의 어둠이라거나 영혼이라거나 먼지라거나 영원 같은 것, 시간의 잔해 같은 것, 인간의 잔해 같은 것, 도모를 도모이게 하는 그 무언가를 들여다보려 애쓰는 저 인간. 저 인간의 찌푸린 미간과 실현 불가능한 충동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아무튼 인간들이란 귀신을 본다는 검은 고양이나 허공을 보며 컹컹 짖는 개를 무서워하면서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리고 저 인간의 시선이 파고드는 구멍, 도모의 안쪽 공간, 여기에는 내가 있다. 물론 내게도 영혼쯤이야 있고 그러니 나를 영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물론 내게도 지나온 시간이 있고 그러니 나를 시간이라고, 시간의 증거라고, 시간의 잔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누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시간이고 영혼이다. 시간이고 영혼이므로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다는 기분을 주는 미미한 몸이다. 도모는 적당한 어둠과 적당한 밝음, 적당한 그림자, 적당한 소음과 인파를 거느린 공간이다.

내가 죽어가기에 도모보다 완벽한 공간은 없을 것이다. 내 몸을 누인 곳, 이곳은 도모의 코끝에 마련된 공간이다. 얼굴의 중심부에 위치한 데다 울퉁불퉁한 구멍이 입구를 대신하고 있는 덕분에 도모의 내부에서는 가장 밝은 방이다. 도모를 위해 알맞게 설정된 조명이 실내로 은은하게 스며드는 한낮이다.

사람들은 코끝에 난 컴컴한 구멍 속에서 죽어 누워 있는 나를 포함한 도모, 살아 있는 공간인 도모를 보며 정말 도모의 영혼과 만난 것 같지 않냐고, 정말 이상한 체험이라고 말하면서 밝고 커다란 전시실을 빠져나간다. 내가 유령과 영혼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쩌면 나는 영혼이 되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는 저들의 팔 안쪽에 오소소 소름이 돋게 만드는 작고 서늘한 바람 한 줄기를 일으키며 이곳을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도모는 얼어 있던 시간이다. 도모는 녹아내리기 시작한 시간이다.

도모 앞에 선 순간 시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도모가 그 애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목구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모가 그 애의 몇 번째 삶인지도. 그 애가 결코 가본 적 없을 성년의 삶에 도착해 있는 얼굴이라는 것도. 심지어 냄새조차도. 우리 사이에 낀 그 두터운 시간에도 불구하고 은폐는 끝났다. 밀폐는 실패했다.

시선과 닿자 녹아버린 도모의 내부에서 줄줄 흘러내린 것은 기억이 아니라 그냥 삶 자체였다. 모든 시간이었다. 마개가 빠진 호리병처럼 내 어딘가에서 지난 삶이 줄줄 새어 나왔다. 지난 삶들은 피리 소리에 반응하는 항아리 속의 뱀들처럼 구불대며 몸을 누설했다. 장면이 되기 이전의 삶. 나를 떠나지 않을 감정들. 켜켜이 쌓인 다른 삶들 속에서 아무렇게나 밀봉되어 있던 어떤 삶. 그 모든 것이 도모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다시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사물은 모든 것을 가둬놓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시간을 무늬처럼 새기고 있거나 액체로 만들어 담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꿈틀대며 뛰쳐나온 비선형의 시간이 사방에서 요동친다. 그리고 유실된 장면들. 이제 그날에 대한 것이라면 몇 개의 감각만이 굴러다닐 뿐이다. 하얀 털로 뒤덮인 내 작은 머리로는 그것이 나를 둘러싼 공기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낯설었던, 상상해 본 적 없었던 그 엄청난 열기. 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 속으로 내 머리통을 집어넣어 폭 감싸 안아주던 그 애, 그러니까 지금은 도모의 얼굴로 내 앞에 있는 그 애. 오 년의 삶, 내 종의 시간으로는 삼십오 년 정도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맡아본 적 없었던 낯선 냄새가 맹렬하게 공기를 뒤덮고 코의 점막까지 침침하게 만들던 그 끔찍한 느낌. 냄새의 외피를 입은 재앙. 다른 모든 냄새를 집어삼키며 흘러내리던 재앙의 냄새. 그래서 땀으로 흠뻑 젖은 옷과 축축한 피부에 코가 닿아 있는데도 그 애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던 것.

그리고 알아버린 것이다. 서울에서는 어디를 걸어도, 어디에서 창밖을 내다보아도 산을 보지 않기가 어려워 바닥만 보며 걷는 연습을 해야 했던 이유를. 숯불구이, 불란서, 불장난, 불꽃놀이, 불한증막…… ‘불’이라는 글자만 마주쳐도 토지기가 밀려 나왔던 이유를. 불 앞에 선다는 상상만으로도 다리가 풀려 우유를 부은 시리얼이나 오트밀 따위가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전부였던 이유를. 차가운 빵이나 콩국수 같은 것, 평생 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음식만을 먹으며 살아야 했던 이유를. 산의 가능성, 산의 과거, 산의 미래, 산이 품은 불, 산과 열기, 산과 재.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곤경의 시작을.

우리가 파묻혀 있을 때 그곳은 축축했던가, 버석했던가, 차가웠던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였다면 그곳이 차갑건 뜨겁건 질퍽하건 맨손으로, 나의 냄새나고 뜨거운 손으로 헤집어 도모를 파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 애의 얼굴은 이제 먼지 한 톨 없이 세상만사에서 벗어나 미술관의 조명 아래 있다. 미생물 대신 수많은 눈동자의 시선 아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흙 속에 있을 때와 별다를 것도 없이. 석조건물의 두꺼운 벽 안쪽에서 외부의 침입을 차단한 채로.

몸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한 저 끔찍하게 새하얀 좌대라니. 아이고, 아이고, 너는 이렇게 죽지도 못하고 있구나. 반쯤 죽고 반쯤 산 채로 몇 세기를 뜬눈으로 지새우는구나. 아름다움을 제공하느라 이렇게 백주대로나 다름없는 환한 곳에, 타들어 가는 피부 위로 쏟아지는 인공 빛 속에서, 누일 몸도 없이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이렇게 있구나.

나는 울었다. 이제 그 애를 위해 바닥을 구르며 엉엉 울 수도 있는 두 손과 발이, 얼굴을 흠뻑 적실 수 있는 액체를 배출할 두 눈동자를 가졌다는 사실이 기쁘고 슬퍼서 더 거세게 울었다. 흠뻑 젖은 흰 셔츠가 등에 달라붙어 볼썽사납게 살을 비추도록 울었다. 옛날 옛적 그 애가 나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고 흘렸던 눈물들이, 스며들어 굳었던 그것들이 이제서야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도모의 반려종이었던 내가 사물이 된 도모 앞에 엎드린 채 경련하듯 덜덜 떨고, 머리를 쿵쿵 바닥에 찧고, 주먹 쥔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울고 있다. 바깥은 열기로 가득한 여름이다. 40년 만의 폭염. 어쩌면 이대로 모든 것이 열기에 파묻힌 채 그것이 차갑게 식어 굳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살은 모두 허물어지고, 뼈는 삭고 삭아 사라지고, 그것들이 있었던 빈 공간에 들이부은 석고나 유리 섬유 따위로 만들어진 그 애와 내가 나란히 사물인 채로 발견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열기로 가득한 여름이다.

나는 도모와 나란히 놓여 아름다운 사물로서,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이미지로서 완벽할 아름다운 자세를 연구하며 매무새를 고쳐 엎드려 본다. 우리의 몸 위로 쌓이는 시선들이 우리를 투명하게 다시 파묻는다. 푹신한 시간이 우리 위로 덮인다.
<hr >
이 글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2022.3.24~5.22,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본 권진규의 조각 ‘도모’를 재료 삼아 쓴 것이다.
권진규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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