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 회장이 사우디 건설사업에 참여한 지 50년 만에 현대차가 사우디 전기차 사업에 진출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23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 22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 페어몬트 호텔에서 열린 ‘한·사우디 투자포럼’에서 “사우디가 중동의 '자동차산업 메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현대차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우디 국부펀드(PIF)와 공동으로 5억달러를 투자해 사우디 현지에 자동차 반제품조립(CKD) 공장을 짓는 합작투자 계약을 맺었다. 양측은 2024년 공장을 착공해 2026년 상반기부터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등 연 5만대 규모 차량을 생산할 계획이다.
현대차가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지역에 공장을 짓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 회장은 현대차의 사우디 진출을 두고 조부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렸다. 정 명예회장이 이끈 현대건설은 1976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면서 사우디 건설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주베일항 수주액 9억3000만달러는 당시 정부 예산 2조원의 25% 수준에 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같은 날 행사에서 “사우디는 삼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라며 사우디 진출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이 회장은 “(삼성은)휴대폰 사업 뿐 아니라 사우디 최초의 메트로 건설 사업, 네옴 프로젝트도 같이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협력할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사우디 ‘비전 2030’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투자포럼 개최를 주도한 사우디 투자부는 양국 경제협력의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양국 기업들이 체결하는 양해각서(MOU)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 개최 당일 새벽까지 양국 기업이 추진하는 협력 성과에 대한 검증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선정 기준을 넘지 못한 일부 사업들은 최종적으로 MOU가 좌절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투자포럼 메인행사 중 하나로 개최된 ‘현대차-PIF 자동차 생산 합작투자 계약 체결식’은 당초 다른 MOU와 마찬가지로 당일 오전 별도 MOU 서명식에서 추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바지에 사우디 정부 측의 강한 요구로 윤 대통령이 임석하는 메인행사의 주된 이벤트로 변경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기업들도 한국과의 투자포럼 개최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포럼에 앞서 열린 윤 대통령과의 사전 환담에는 사우디 기업들의 참석 요청이 쇄도했다. 당초 극히 소인수만 참석하는 것으로 계획했던 양국 정부는 사우디 측의 강한 요청에 따라 참석 규모를 좁은 환담장이 허용하는 최대 인원으로 확대했다. 행사 직전까지 환담장 참석을 위해 치열히 경쟁했던 일부 사우디 기업인들은 환담에서 제외되자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는 후문이다.
사우디의 주요 경제부처 장관과 기업인들 역시 한국과의 경제협력 의지를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알 코라예프 산업광물자원부 장관은 “사우디 새로운 산업전략의 핵심은 자동차로 현대차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모델 사례가 되도록 할 것”이라며 “한-사우디 협력이 단순히 중동 시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최적의 지정학적 위치를 바탕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갈 전초기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알 파이살 사우디텔레콤(STC) 회장은 “한국 통신기술이 세계 최고인 만큼 한국 기업과의 협력이 확대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알 루마이얀 PIF 총재는 “PIF는 매년 400~500억달러를 투자하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을 한국이 차지한다”며 “더 많은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리야드=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