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가난한 화가가 있다. 노르웨이 작은 항구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위대한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로 유학을 왔다. 그런데 저명한 화가 한스 구데 교수가 그림을 평가해주기로 한 날, 그는 아카데미에 결석해 버린다. 고향을 떠나기 전 선물 받은 양복까지 갖춰 입고서. 그를 주저앉힌 것은 ‘사실 내가 별 볼 일 없는 화가일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다.
지난 13일 국내 출간된 욘 포세(사진)의 소설 <멜랑콜리아Ⅰ-Ⅱ>는 실존 인물인 노르웨이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신경쇠약과 우울증(멜랑콜리아)에 걸린 인물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포세가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자 민음사는 출간 일정을 당겨 책을 선보였다. 예약판매만으로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은 포세가 1995년 발표한 ‘멜랑콜리아Ⅰ’과 이듬해 발표한 ‘멜랑콜리아Ⅱ’를 한데 묶었다. 진입장벽이 제법 높다. 신뢰할 수도, 애정할 수도 없는 화자의 강박과 우울, 궤변이 쏟아져서다. ‘멜랑콜리아Ⅰ’은 헤르테르비그의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오가는데, 신경쇠약에 빠진 헤르테르비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병든 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조금만 참을성을 갖고 헤르테르비그의 말을 들여다보면 그의 애처로운 마음이 드러난다. 그는 동료 화가들을 향해 “자네는 그림을 못 그려”라고,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앵무새처럼 말해 미움을 산다. 자신의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이 훌륭하다고 으스댄다. “나는 코듀로이 양복이 어울리는 사람이다”라고 반복하는 틈에는 이런 불안의 문장이 숨어 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코듀로이 옷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누더기 조끼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예술에 대한 애정, 그러나 그 애정이 끝내 응답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헤르테르비그를 잠식한다. “나는 평생 이렇다 할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은 죽은 뒤에야 세상의 주목을 받았고, 오늘날 그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힌다.
소설은 마치 클래식 음악의 론도 형식처럼, 같은 문장을 반복하되 변주하고 확장하며 등장인물의 우울을 은밀하게 전한다. 이어지는 ‘멜랑콜리아Ⅱ’의 주인공은 헤르테르비그의 누이, 허구의 인물 ‘올리네’다. 노인이 된 그녀를 통해 소설은 예술가가 아닌, 평범한 인물의 허무와 우울까지 그려낸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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